네가 나에게 말해주었잖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긴 여행은
삶이고, 사랑이라고.
우리는 여행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중 일부와 동행하게 되잖아. 이렇게 함께 여행하는 것 같아도, 사실 우리는 혼자 여행을 하는 거잖아.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것을 보아도 결국엔 다른 생각을 하잖아. 그래서 함께하는 여행이 더 풍성해지는 걸지도 모르겠어. 혼자만의 여행도 깊이가 있겠지만, 함께하는 여행은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잖아. 내가 모르던 나의 말버릇과 습관이나, 네가 모르던 네 눈에 담긴 빛깔과 살의 결을 내가 알아차리는 것처럼 말이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우리는, 앞으로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새로 만나고 또 헤어지고 하겠지만, 어떤 순간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기억해두고 싶어. 시간이 지나 언제 들추어봐도 힘이 될게 분명하니까.
모 애니메이션의 누군가가 말했다. '역시 인간은 재미있어.'라고. 제 코가 석자라 내 한 몸 간수하기도 버거운 세상이지만, 그래도 조금 여유를 갖고 내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자. 그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부정적이던 긍정적이던 영향을 미치며, 때로는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기도 한다.
유칼립투스는 800여 가지가 넘는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분은 겨우 3가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800가지로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있지만, 우리는 겨우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만큼의 이름(블랙잭, 폴리안, 파블로)을 붙인다. 우리에겐 800여 가지나 되는 유칼립투스의 종류를 구분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한계가 있으며, 세상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 투성이라는 것을 알게끔 도와준다. 살아가면서 뇌의 3%를 겨우 사용할 뿐이라는 일반인의 범주에 우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머리카락 한 올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뿐더러,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자신의 뒷모습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볼 수도 없다.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그만큼 우리의 능력이 닿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작은 것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쏜살 같이 흐르는 시간을 잡아 그 흐름에 눈과 귀를 바짝 대고 관찰해야 한다.
하루는 내 연인이 나에게 초등학생 시절 일기장을 보여준 일이 있다. 10살 남짓의 그는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말을 일기장에 적어 두었다. 볕이 좋은 어느 봄날,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아카시아는 햇님이 준 선물이다'라고 적었고, 어느 날은 책을 읽다가 크게 감명을 받았는지 '책을 읽는 것은 지식을 쌓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을 쌓는 것이다.'라고 적어두었다. 그리고 그가 다니던 학교로 전학 온 아이에게는 '우리 학교는 햇볕이 잘 드는 경치 좋은 곳에 세워져 있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10살 남짓의 아이가 적었다고는 믿기 어려운 표현이었고, 서른을 넘긴 지금 문학적인 감성과는 1도 관계가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그 역시 동의했다. 사실 우리의 문명이 외계의 어느 문명만큼 발달했었는데 빙하기(혹은 소행성 충돌)로 인해 다시 뗀석기 시대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심해의 어느 고대 문명의 제단에서 고기술 집약적인 승강기가 발견되었다. 는 말을 들은 것과 흡사한 기분이 들었다.
30년을 넘게 함께 살아온 가족도 서로를 다 알지 못하며, 하물며 스스로에 대해 알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우리 안에 800갈래의 길이 있다 해도, 자각할 수 있는 건 3갈래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고, 3가지를 9가지로 나누고, 다시 81가지로 나눌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선택할 몫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염두에 두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놀라운 존재이며, 우리가 자각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들로 인해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 누구나 그런 것들이 하나쯤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며, 그걸 자각하는 순간 삶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혹은 우리가 이미 놀라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놀라움에 대해 무뎌져 있기 때문에 별 것 아닌 것으로 넘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반짝임이라면, 서로가 보아주는 것은 어떨까.
아마도 향수를 만들던 날에 너무 많은 향을 맡아서 후각이 무뎌졌던 것 같다. 어제는 몇 번을 뿌려도 그 전날만큼 향이 잘 나질 않았는데, 오늘 뿌린 향수는 아침에 아침에 뿌린 것이 아직까지 난다. 물론 12시간이나 지난 향은 아침과는 다르게 느껴지지만, 사람에게도 거하게 취하게 되면 일정 부분 무뎌지는 면이 생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감각은 금방 제자리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