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김영하
처음 책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에세이를 쓰는 것이 좋을지
소설을 쓰는 것이 좋을지 많은 고민이 됐었다.
에세이를 쓰자니
나의 뇌 용량이 너무나 궁핍했고,
소설을 쓰자니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책(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을 다 완성해 갈 즈음에야 와서 느낀 것이 있는데, 내가 이 글을 몇 번 썼다 지웠는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글과 씨름하다 보면, 내가 글인지 글이 나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예전 같았다면 '소설가의 에세이라니, 마치 우리 엄마가 돼지고기가 아닌 참치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인 것 같다.'고 생각했겠지만 소설이던 에세이던 그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음엔 차이가 없었다. 소설과 에세이는 각기 다른 매력이 있지만, 김영하 작가의 『보다』에는 두 가지 매력이 모두 담겨있었다.
"무지요. 가난에 대한 무지, 부에 대한 무지요."
빙고, 부자를 정말 부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지다.
부에 대해 가난한 자와 부자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것처럼, 우리는 직장에서 종종 시니어와 주니어의 입장이 상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디렉팅에 익숙한 사람들은 실무의 프로세스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고, 실무가 몸에 익은 사람들은 보다 큰 퍼즐을 봐야 하는 디렉팅이 낯선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다. '거기 사이즈만 줄여서 그냥 발주 넘겨요.' '거기'의 '사이즈'를 줄이는 순간, '이쪽'의 여백이 펑하고 비어 버리면서 '저쪽'의 비율이 깨져, 전반적으로 '그냥 발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는 사실을 디렉터는 간과하기 쉽다. 반면에, 주니어들의 경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퍼즐의 어떤 조각으로 쓰일지 알기 힘들기 때문에, A를 해놓으라는 시니어의 지시에 B-1, B-2, B-3... 만 열거하는 경우 또한 종종있다.
이처럼 서로의 영역에 대해 무지할 때, 시니어는 더욱 시니어처럼 보이고, 주니어는 더욱 주니어처럼 보인다. 이러한 간극을 좁혀가며 퍼즐을 완성하는 게 양측 간의 역할이지만, 둘 사이에 있는 간극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는 또 다른 문제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고로, '쌀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시니어에게 노블레스의 정신이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자유가 이렇게 힘의 논리를 포장하는 명분에 불과한 사회에선
15세기 유럽인들은 신항로 개척을 명목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떠났다. 그들 중 일부가 살아온 터전이 아닌 새로운 기후와 식생이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마치 '오늘은 사과가 아닌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한 것처럼, 그것도 '여태껏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신 포도'를 말이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생명들은 어제까지도 자고 일어나고 먹고 자고 했던 삶의 터전을 '개척'당했다. 유럽 대륙에 살고 있었던 15세기 유럽인들은 새로운 땅과 식생을 찾아 떠나는 자유를 누렸지만, 이미 그곳에는 생명들이 살아 있었고, 삶이 터전이 일구어져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 떠나온 그들에게 '자유'는 '약탈의 권리'를 의미했다.
'선택의 자유'라는 말을 종종 한다. 선택할 수 있다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고객이 자유롭게 선택한 걸 네가 왜 방해해?(본문 18p)'라고 과거 김영하 작가의 상사는 이야기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근래에는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2019년 서울, 여름의 거리에는 흑당 밀크티 그림이 유독 많이 눈에 띄었다. 한 블록 건너 한 블록마다 보이는 그것을 오다가다 어쩌다가 한 번쯤은 꼭 마셨던 것 같다. 한 번은 흑당 밀크티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얼그레이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 나오는데, 맞은편 닭강정 가게에 있는 흑당 팥빙수 배너를 보고 질려버린 일도 있었다. 내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한 것 같지만, 이미 정해진 선택지 안에서의 '자유'로운 선택은 어쩐지 뒷 맛이 씁쓸하다.
자, 그렇다면 유럽인들이 누린 '자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단지 그들의 기호를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전에도 사실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토착민들의 터전을 빼앗을 명목으로 '자유'를 앞세우며, '신'항로 개척이니, '신'대륙 발견이니 하는 말로 환상을 부추긴 것이다.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한)
'잠은 죽음을 위한 짧은 연습'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타나토노트』에서 사후 세계에 관한 판타지를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또한, 해를 달리 할수록 이곳저곳에서 호스피스와 관련된 사진전이 개최되었다거나, 관련 서적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종종 들려온다. 죽음은 우리의 의지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언제나 흥미를 끄는 것 같다. 불확실한 영역에 대해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동하는 것이다.
한 번은 내 연인을 따라 『있는 것은 아름답다.-앤드류 조지』사진전을 보러 간 일이 있었다. 전시장 내에는 음악이라고 하기엔 뭣 한 웅웅 거리는 듯 한 배경음이 낮게 깔려 있었다. 낮게 울리는 그 소리 탓에 몸이 나른하게 발아래로 꺼지는 듯 한 느낌을 전시장에 있는 내내 받았다. 사방에 걸려있는 사진들은 실물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로 인화되어 있었고, 사진 옆에는 실제 그들과 나누었던 인터뷰의 대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덕분에 사진 속 인물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무게감이 상당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내가 얻은 것은 죽음에 대한 궁금증의 해결이나 죽음을 대처하는 이렇다 할 방법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죽음은 삶의 흐름 중에 있어 자연스레 지나치게 되는 일련의 과정에 불과할 뿐이었고, 이미 사진 속 사람들은 그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예외 없이 모두가 거치게 되는 단계 중 하나 일 뿐이었다. 죽음은 학교나 직장, 결혼과 같이 선택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이벤트와 달리,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관문인 것이다.
김영하작가는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 더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 작가의 말 中'
표현하기 위해선 잘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 정리하기 위해선, 정리할 만한 내용들을 그러모으는 일이 중요하고, 정리할 만한 내용을 선별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덕목이 요구된다. 후천적으로 갈고닦을 수 있는 감각이 있는 반면에, 후천적으로 얻을 수 없는 감도 일부 존재한다. 다만,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이 나중에라도 얻을 수 없는 그것에 가까이 가기 위해선, 날을 세우고 매사를 예민하게 살피는 능력을 개발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멍 때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글쓴이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길이겠으나, 욕심이 나니 걸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