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악필이라면서요
관계나 글이나 빈자리를 남기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빈자리를 만드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 빈자리를 그대로 놔두는 일 또한 생각만큼 쉽지 않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추구할 만한 미(美)인 것이다.
여백은.
작년 말, 경조사 봉투에 이름 석자 적기가 부끄러울 만큼 내 글씨의 모양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느낀 이후로 틈틈이 필사를 해오고 있었다. 처음엔 단지 휘갈기는 모양의 손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작한 베껴쓰기였다. 가로로 정갈하게 그어진 줄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글씨의 모양을 다듬어 보자는 것이 목표였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유튜브 영상을 따라 해보기도 하고, 모 기업의 손글씨 대회에서 수상했다는 예쁜 글씨를 프린트해 놓고 따라 써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반듯반듯하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장식적인 글씨보다는 가독성이 높은 글씨를 쓰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어쩌면 손 끝에 너무 힘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급한 마음으로 글자를 적다 보니 글자의 모양도 덩달아 날아다니는 걸까. 글씨도 마음도 차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올해 초에 필사를 시작할 즈음엔 단순히 글자의 네모짐과 동그란 모양이 예쁜지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 위에 그어지는 선의 느낌과 볼펜 끝이 종이와 마찰될 때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이 주는 간지러움이 기분 좋게 와 닿았다.
보편적으로 글자를 적을 때 여백을 채우는 듯한 느낌으로 글을 쓰게 마련이다. 하지만 편집디자인의 영역에서 그리드의 콘트라스트를 잡을 때 여백의 흐름을 유의하여 살피듯이 글을 쓸 때 또한 적어 내려가는 글자의 여백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이응의 속 공간은 충분한지, 다음 초성과 종성이 위치할 자리는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지, 남은 여백을 고려하여 글자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지 등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우리가 종이 위에 글자를 쓸 때, 여백을 어떻게 남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선 다음 글자가 올 자리를 충분히 비워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에 영화 『윤희에게』를 보았는데, 일본 영화인 『토니 타키타니』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영화의 중간중간 여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여백은 관객들로 하여금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머릿속에 생각이 많을 때 본다면 잠시 머리를 비우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가장 어려운 연기는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채로 장시간 포커스를 견뎌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어라도 하고 있는 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보다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극이 흘러가는 것 만으로 좋게 보이기는 상당히 어렵다. 자극적인 사건의 나열 없이 극의 흡입력을 높이는 쪽이 더 난이도가 높다. 모쪼록 새벽 감성을 한 사발 들이킨 채로 청승 떨며 한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여배우들이 말하는 톤도 참 좋았다. 추운 것과 눈 내리는걸 정말 싫어하는데 영화 내내 눈을 참 예쁘게도 쌓아 놓았더라. 하마터면 오타루행 비행기 편을 예약할 뻔했다.
삶에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며칠 전부터 너무 좋아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종이에 베껴 쓰고 있는 글이다. 문장에서 '지지'하고 '지'자가 두 번 반복되는 부분이 특히 좋다. 성질이 급한 나는 문장의 끄트머리에 가서 긴장을 하지 않으면 곧 잘 '찌'라고 적어버리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두 개의 '지'가 제대로 설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는 성급함과 배려 없음이 부른 참사다. 끝을 놓을 수 없는 긴장을 주는 문장이라 좋아한다. 박노해 시인의 시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