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 임대형 감독
어제는 두부가 새벽(3시 30분 즈음)에 너무도 애절하게 울길래 거실에 나가보았다. 옹크리고 앉아 어깨(가 있다면, 요즘엔 살이 쪄서 목인지 어깨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를 잔뜩 안으로 말고 목을 집어넣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무언가 원하는 게 있어 보였다.
밥도 먹었겠다. 잠도 잤겠다. 다들 잠든 이 시간에 놀자는 것은 아닐 테고, 아마도 뜨거운 전기장판 위에서 자느라 달궈진 몸을 식히기 위해 물을 너무 많이 마신 게지.
두부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오니 12월을 지나는 새벽의 공기가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안에 사람을 넣어두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린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 그 방은 완전히 고립되어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보았던 것 같다.
아무튼 말 그대로 적막 속에 있자니 얼마 전에 영화관에서 보았던 <윤희에게>가 떠올랐다. 앞으로도 종종 고요 속에 머무를 일이 생긴다면 자주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리뷰는 처음 써보는 것이지만 이 고요함에 대해 기록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너도 이곳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영화 <윤희에게>에서 묘사하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조용하다. 대화를 나누는 배우들의 톤 조차도 조곤조곤하다. 김희애 배우님이 이야기하는 톤도 차분하고 좋았지만, 쥰(나카무라 유코)이 윤희(김희애)에게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로 서두를 떼는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 또한 정말 좋았다.
배우들의 목소리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극 중 쥰이 윤희에게 눈 내리는 유타로를 가리켜 '너도 이곳에 잘 어울릴 것 같다.'라고 편지한 것도 일리가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킬 기새로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쥰과 윤희 역시 작은 움직임과 작은 목소리를 낼 뿐이었지만, 분명하고 확연하게 주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필름에 담긴 오타루는 정말 조용한 동네다. 그런 오타루에는 눈과 달과 밤과 고요만 있을 뿐이라, 윤희 또한 이 곳을 참 좋아할 것 같다.고 쥰은 이야기한다. <윤희에게>의 영어 제목은 <moonlit winter>이다. 수의사인 쥰은 구조된 길고양이에게 '月'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윤희와 새봄이 걷는 밤길에 서있던 취객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満月だね'라고 이야기한다. 오타루의 밤하늘은 만월이다. 오타루의 달은 고요하게 쌓인 눈이 덮인 마을을 환히 비춘다.
윤희의 딸 새봄은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삼촌의 사진관에서 인화한 그녀의 필름에는 사람이 없는 나무와 하늘이 담겨 있다. 삼촌이 새봄의 솜씨를 칭찬하며 사람도 좀 찍는 것 어떻냐며 조언한다. 그러자 새봄은 본인은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장면이다. 윤희는 오빠(새봄의 삼촌)가 소개해주는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지만, 새봄은 주도적으로 삶을 꾸려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처음 필름 카메라를 손에 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집 앞 공원에 놀러 나가선 하늘이나 나무를 찍다가 아빠에게 혼이 나곤 했었다. 아마도 허공을 찍느라 아까운 필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카메라를 처음 접했던 그때에는 인물사진보다 그런 것들을 렌즈에 담는 일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차곡차곡 나무며 하늘을 모으는 일이 즐거웠다는 생각이다.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
쥰의 엄마인 마사코는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 오타루는 겨우 내내 눈이 내리다 못해 4월이 되도록 그치지 않는 동네다. 성인의 허리쯤은 우스운 적설량을 보여주는 그곳에서 살아온 마사코가 언제 눈이 그칠지에 대해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임대형 감독이 한 카페에서 할머니들이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하며 나누는 대화를 듣고 <윤희에게>를 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어느 인터뷰에서 보았다. 그 말은 정말로 눈이 그치는 때를 알지 못하여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 올 날이 멀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떠한 먹먹함을 표현하기 위해 허공에 던지는 말일 테다.
지금 당장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서,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하고 허공에 던지는 말소리가 늘어만 갈지도 모르겠다. 그럴 땐 겨울밤을 비추는 만월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쌓아두었던 생각들을 꺼내보자. 언젠가 쥰에게 그랬던 것처럼 묵혀두었던 편지를 붙이게 되는 날이 찾아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