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그라나타
melt 04
Topˏˋ blood orangeˏ bitter
Midˋˏ jasmineˏ geranium
Baseˏˋ tonka beanˏ sandalwoodˏ amber
Fanta는 시판되는 국가에서 생산하는 오렌지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선명한 주황색 환타 캔은 몇 년째 냉장고도 뱃속도 아닌, 책상 위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에 살림을 꾸린 친구에게 선물 받은 환타 캔이었다. 한 뼘 길이의 알루미늄 캔은 이제 막 중천에 뜨기 시작한 해를 마주 보고 있었는데, 그 덕에 주황색 표면 위에 하얗게 인쇄된 알파벳이 더욱더 선명하게 보였다. 저 캔을 따면 상상으로 그려지는 그 향이 날 것만 같았고, 그래서 개봉하지 않은 채 몇 년째 같은 위치에 모셔두고 있던 것이다.
창밖엔 나탈레(이탈리아의 크리스마스) 주간의 어수선함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들뜬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부지방 사람들 특유의 텐션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다. 시르미오네와 제노바의 한적한 골목이 그리웠다.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요 며칠간 창문을 꽁꽁 걸어 두었다. 제대로 환기를 하지 못했더니 집안 공기가 여간 갑갑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노트북을 책상의 한쪽으로 밀어둔 뒤,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남부지방 특유의 높낮이 차 큰 악센트가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들뜨는 것도 당연하다. 지금은 연말이고, 이제 곧 2020년의 새 해가 밝아 올 테니.
환기를 포기하고 창문을 닫아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에 옆집 발코니에 나와 담배를 피우던 노신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밤색 스웨터와 흰 바탕에 파란색 가는 줄무늬가 간 파자마 바지 차림이었다. "scusi" 신사는 짧게 사과하며,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답답한 집안의 공기를 환기한답시고 옆집의 담배 연기를 들이고 있었군. 저녁이 오기 전에 산책을 조금 하는 편이 건강에 더 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의 추위를 녹여주는 뱅쇼도 좋지만,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이 시간엔 역시 그라니타다. 특히 아무런 부재료도 넣지 않고, 시칠리아의 오렌지를 갈아 얼린 그라니타는 향이 풍부하다. 사실 맛이야 젤라또와 비교할게 못 되겠지만, 향만큼은 원재료의 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그라니타를 선호하는 편이다.
집 근처의 해안 절벽까지 조금 걸어 나갈 요량으로 산책로 초입의 가판대를 찾았다. 가판대 직원은 파사드에 진열되어있던 오렌지를 몇 개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500ml 정도 되어 보이는 큰 종이컵에 그라니타를 담아 나왔다. 그에게서 잔을 건네받자 갓 짜낸 오렌지향이 확 하고 끼쳐왔다.
지난주엔 북부에 위치한 친구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나탈레 기간을 보내고 이번 주에 시칠리아로 돌아왔다. 이게 북부와 남부의 기온차인가 싶을 정도로 시칠리아의 태양은 12월임에도 불구하고 뜨거웠다. 그늘 한 점 없는 허허벌판에 서서 온 몸으로 태양빛을 쬐고 있다니, 캐시미어로 된 터틀넥 스웨터가 조금 갑갑하게 느껴졌다.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말아 목덜미를 잡아당겨 조금 헐겁게 만드니, 바닷바람이 뒷목을 타고 목뼈와 척추뼈가 만나는 부근까지 타고 내려왔다 이내 사라졌다.
산책로는 바다를 마주한 해단 절벽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다. 길을 따라 걷다가 적당한 벤치가 보이면 잠시 앉아서 그라니타를 마실 생각이었지만, 좀처럼 빈 벤치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바다를 마주 보고 섰다. 간간히 조각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은 파란색이었고, 그 하늘은 바다 또한 파란색이었다. 마주 불어오는 바람은 눈으론 볼 수 없는 수평선 저 너머 어딘가의 향을 실어왔다.
오른손에 들려있는 종이컵에 점점 물기가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라니타가 금세 녹아내릴만한 기온이었다. 맹물이 아닌 얼음을 조금이라도 씹어 넘기고 싶다면, 지금 컵을 들고 마시는 것이 좋겠다. 처음보다 많이 눅눅해진 종이컵에서 오렌지향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컵을 다 비운 뒤에도 오른손에는 한동안 오렌지 향이 남아 있겠지.
Noteˏ
오렌지 / 그라나타 / 태양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생 오렌지 향입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남는 자스민과 샌달우드의 향기가 남습니다.
처음 해외로 나섰던 날을 떠올렸습니다. 12월 즈음이었는데, 한낮의 태양이 생각보다 뜨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발이 묶이기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간절하게 만드는 향기 었어요. 강렬한 오렌지향과 어울리는 지중해 혹은 남미가 그리워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글은 paffem의 'melt 04. 오렌지빛 꽃물'향수를 테마로 작성된 단편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