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맺은 인연
결혼을 하고 집사람이 다니는 직장 사택에서 약 7년을 살았습니다. 제가 살았던 마을은 대도시 근교이면서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곳입니다.
혹시 ‘문디병’이라고 들어 보셨는지요? 한센병, 나병이라고도 하지요. 이곳은 바로 이런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문디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흔히 나병 환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병이 진행되는 분들, 그리고 병이 완치되어 진행이 멈춘 분들입니다.
나병을 앓은 나환자들은 병이 완전히 치유가 되어도 흉터가 남습니다. 손이 뒤틀리거나, 입이 돌아가거나, 눈 동자가 없거나 표시가 납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런분들을 분리해 집장촌을 만들어 살게 했습니다. 양성 나환자 즉 아직도 나병이 진행 중인 환자들은 주로 소록도 등지로 보냈구요.
이렇게 분리하여 만들어 놓은 집성촌이 전국각지에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곳을 ‘문디촌’이라 부릅니다.
문디촌......
그렇습니다. 제가 살았던 동네가 바로 그 문디촌입니다. 나병환자들 중에서도 그 병이 완전히 완치된 음성 나환자들의 집성촌입니다.
문디촌 마을 꼭대기에는 병원이 하나 있습니다. 정부에서 지은 병원인데 이 마을 사람들이 무료로 와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어 놓은 병원입니다.
보건소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도 같네요. 이 병원이 설립된 지 올해로 정확히 37년이 되었고, 그 중 25년을 제 아내가 간호사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고향은 전라도 광주입니다. 아내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곳으로 내려와서 첫 근무를 시작하였고, 벌써 25년 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친척하나 없는 생면부지의 이곳에서 아내는 병원 사택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 마을 사람들과 생활을 같이 하기 시작 했습니다. 처음 아내는 마을 사람들의 일그러진 눈과 뒤틀린 손 등을 보며 가까이 하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아내의 마음을 동네 사람들도 알았는지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 병원 바로 앞에 사시는 한 분의 할머니께서는 본인이 직접 기른 상추, 무, 가지, 오이 등을 새벽에 집사람이 사는 사택 문 앞에 놔두는 등 집사람을 차별없이 대했다고 합니다.
처음 아내는 그런 야채를 하나도 먹지 않고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들의 순수한 마음이 전해졌고 아내도 진정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앞집 할머니와는 친 모녀지간처럼 지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고 2년 만에 나병에 걸려 시댁과 친정 모두에서 쫓겨나 이 마을로 오게 되셨라는 할머니.
그 할머니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한명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한번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고 쫓겨 이 마을로 오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또 다른 사연을 가진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아이는 가지지 않고 그냥 딸아이 하나 입양을 해서 키웠습니다.
딸아이는 아내 보다 3살 어렸는데 아내를 친언니 따르듯이 잘 따랐습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20년이나 이어졌습니다.
어김없이 아침에 문을 열면 상추며, 무, 가지, 오이 등 각종 야채가 있고 저 너머에서 걸걸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신선한 거다 많이 묵어라”
그러면 지나가는 동네 주민들이 한 소리 합니다.
"그 놈의 할망구 목소리하고는.... 동네가 다 떠나 가겠다"
제가 이 동네에 들어와 산 것은 약 7년이 됩니다. 아내의 직장 문제와 아이 양육 문제로 인해 아내가 예전 살던 사택으로 들어 왔습니다.
처음 동네 사람들을 만나던 날.... 동네 분들의 뒤틀린 손을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들의 일그러진 눈과 입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외면을 했습니다. 특히 집 문 앞에 놓인 채소로 아내가 밥상을 차리는 날에는 어김없이 큰소리가 오갔습니다.
특히 저를 볼 때마다 사위라고 반겨주시는 그 할머니, 제 아들을 손자라고 부르시며 안을 때에는 몇 번이라도 이놈의 동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은 큰 아들이 할머니 집 간다고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을 때에 죄 없는 아이를 참 많이도 혼내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아들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저를 멀뚱히 쳐다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환경의 변화에 적응을 잘하는 동물이 맞나 보더라구요. 그렇게 시간이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저도 조금씩 그 환경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생활에 동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문 앞에 놓인 오이를 옷에 쓰윽 문지르고는 한 입 베어 물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아이고 우리 사위” 하시는 할머니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손을 잡아드리는 뻔치도 생겼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은 계속 되었습니다. 고기가 들어오면 반드시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고, 돈이 생기면 아들에게 용돈을 주셨고, 가끔은 예고 없이 밥 달라고 저희 집에 처 들어 오곤 하셨습니다. 아들이 묻습니다.
“아빠 난 왜 할머니가 세 명이나 돼? 친할머니, 외할머니, 그리고 병원 할머니까지 세 명이나 된다 나는~~”
그러면 전 빙긋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할머니가 많으면 좋지 뭐”
할머니는 술을 한 잔 드시면 말이 많아 지셨습니다.
고왔던 새색시 때 이야기, 아들이야기, 병들어 처음 마을로 들어 온 이야기......
“내가 처녀 적에는 얼마나 고왔는지 아나? 동네 남정네들이 나를 한번 볼끼라고 난리도 아니였다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할머니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고입니다. 그리고는 곧 목소리에도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똑바로 안아보지도 못했던 그 놈.... 그 놈....을 ... 꼬옥 한번은 보고 죽어야 할텐데.........”
그러면서 노래를 하십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아이고....”
끝맺지도 못하실 노래를 그렇게 청승스럽게 부르십니다.
그 다음날이면 또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온 동네를 활보하십니다.
어느 날입니다.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급하게 걸려 왔습니다. 서울로 시집간 할머니의 딸. 아내를 언니라고 부르고 저를 형부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형부. 언니는요?”
“글쎄 부엌에 있나? 왜?”
“엄마가 전화를 안받네요. 형부가 집에 한번 가봐”
“알았어 내가 지금 가볼게”
전화를 끊고 집으로 갔습니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길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할머니가 방에 쓰러져 계셨습니다. 급하게 119를 불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뇌졸중....... 조금만 늦었어도 사망 하셨을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
서울에 있는 딸과 사위가 내려왔습니다.
하염없이 우는 딸을 달래며 괜찮아 지실 거라고 달랬지만 병세는 점점 악화 되었습니다. 겨우 사람을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가 다시 기절하시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정신을 차리시면 제 손을 꼭 잡으시고는 아들 이야기를 힘겹게 하십니다.
“내가...... 내가...... 꼭 ............만...나....야 하...는데......”
그러시고는 눈물을 흘리시며 기절을 하십니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시면
“내가.......죄.....많은......내가.........용....서....를....빌...어야....하는데......젖도...한..번...못..먹였는데.......”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또 정신을 잃기를 반복하시다가........
그렇게....... 말없이....... 한 많은 이 세상의 인연의 끈을 놓으셨습니다.
어~~야...어이야아~~ 이제가면 언제오나
북망산천 멀다더니 어~~야...어이야아~~
눈감으니 황천일세 어~~야...어이야아~~
명사십리 해당화야 어~~야...어이야아~~
꽃진다고 설워마라 어~~야...어이야아~~
명년삼월 봄이되면 어~~야...어이야아~~
너는다시 피려니와 어~~야...어이야아~~
불쌍하고 애달프다 어~~야...어이야아~~
우리인생 한번가면 어~~야...어이야아~~
돌아오지 못하누나 어~~야...어이야아~~
오늘처럼 추적 추적 비가 내리는 15여년 전 오늘. 꽃 상여 하나가 동네를 가로 질러 나갑니다. 한 많은 이 세상을 뒤로하고 아직도 풀지 못한 한을 가슴에 맺고 그렇게 꽃 상여를 타고 갑니다. 다시 오지도 보지도 못할 이 세상을 뒤로하고 그렇게 비와 함께 갑니다.
꽃 상여가 나간 뒤 몇 일후 늦은 저녁 시간 잠을 자다가 문득 깨서 밖으로 나가니 서재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내였습니다. 손으로 입을 막고 그렇게 아내는 긴 울음을 내 뱉습니다.
“저렇게 갈지 알았으면... 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드시고 가시지.....”
그렇게 자조 섞인 아내의 울음 가득한 탄성이 제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감히 가서 등이라도 두르려 주고 싶지만......
차마.....
그냥 아내의 슬픔을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지만........
잠이 쉬 오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뒤척이며 아침을 눈을 떠 보니 퉁퉁 부은 아내의 눈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냥 어깨를 두드려 주니 아내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어앉아 웁니다.
20년간을 그렇게 모녀로 지내온 정을 끊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은가 봅니다.
그렇게 몇 일간 아내의 울음 섞인 흐느낌은 계속되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 교육 문제로 도시로 나왔지만 지금도 그곳에는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동네 사람들끼리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안다는 동네................
혹시 이곳에서 손이 뒤틀린 사람을 만나거나, 눈이 일그러지고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몇 십년간 터를 잡고 이곳에서 살아온 원주민들이니까요.
그들에게는 작은 미소, 환한 미소만 던져도 됩니다.
오늘 이곳에도 꽃 상여가 나가는 그날처럼 비가 추적 추적 내립니다.
부모- 자녀의 인연이라는 것이 꼭 혈연으로만 엮여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혈연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겠지요. 진심으로 다가가면, 정성으로 대하면, 가슴으로 함께한다면 신뢰라는 혈연관계가 형성되어 지는 것 같습니다.
긴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그런 사람이 바로 신뢰로 맺어진 인연 일겁니다. 가끔은 혈연으로 이어졌지만 신뢰가 깨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많이 봅니다. 진심으로 진정으로 그리고 가슴을 열고 꼬옥 안아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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