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물음일수록 누구도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게다가 이러한 질문들을 떠올릴 때는 무언가 초조하고 불안정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는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산다고 하고 누군가는 자아실현을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쾌락을 위해 산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러한 가치들이 삶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지 묻는다면 타당한 이유를 댈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막연하게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좋아 보여서' 또는 '종교적인 이유로' 등 피상적인 대답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질문을 깊게 파고들어 가면 어느 단계에서 더 이상 대답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삶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때 인간의 존재 가치는 희미해지는 것일까? 의미를 찾지 못한 삶은 헛된 것일까?
우선 '사람은 왜 사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유튜브나 책 등을 통해 어느 정도는 납득할만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선 법륜 스님은 '사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다람쥐가 나는 왜 사는가 고민하며 살지 않듯이 인간도 그냥 사는 것이다'라고. 왜 사느냐?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다. 이유가 먼저가 아니라 존재가 먼저라고. 태어났기 때문에 왜 사느냐 묻는 것이지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거다. 스님 말씀에 따르면 왜 사느냐?라는 의문은 집착이다. 그런 집착은 때로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이유를 계속 파고들다 보면 빈 공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씀을 하셨다. 빈 공간에서 계속 무언가를 찾으려 하는 사람은 허무주의에 빠져 소진될 수 있으며 그 정도가 심해지면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왜 사느냐'가 아니라 '이왕 태어났으니 어떻게 살 거냐?'라고 물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스님의 답은 '자기 좋은 대로'였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까'를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으면 흔히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은 어떻게 사람들을 괴롭히는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사무엘슨 교수는 행복의 공식을 발표했다. '행복=소유/욕망'이라는 것이다. 소유가 많을수록, 혹은 욕망이 줄어들수록 행복이 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유를 늘리는 것도 욕망을 줄이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를 만족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생각을 해봐도 상대적 욕망을 줄이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아직 가지고 싶은 것이 널렸는데 주변 사람들은 다 나보다 많이 가진 것 같을 때, 억지로 욕망의 크기를 줄이고 가진 것에 만족하면 행복해지는 걸까?
상대적 욕망을 줄이는 방법 중 하나로 미니멀 라이프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이 가지는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물건에 지배당하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태도이다. 하지만 미니멀 라이프 세계에서도 빈부격차가 있다. 비싸고 넓은 집에서 미니멀 라이프가 훨씬 쉽다. 물건을 숨길 곳이 많기 때문이다. 넓은 집의 휑한 공간은 좁은 집에서 아등바등 살림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미니멀 라이프가 가진 것 없음을 '검소함'으로 포장하여 자기 합리화를 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니멀 라이프가 허세나 집착, 궁상으로 변질되는 경우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멀쩡한 가구를 버리고 깔끔하고 예쁜 미니멀 디자인의 가구를 새로 사는 경우, 깔끔함에 대한 집착으로 강박적으로 정리를 하는 경우, 가지고 싶은 것은 많지만 사지 않고 참는 것이 미니멀 라이프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억지로 참으려는 노력. 이 모든 것들은 행복해지는 길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듯 어떠한 공식이나 외부의 기준에 자기를 끼워 맞추면 내가 정말 행복할만한 자질을 갖추었나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고 행복과는 점점 멀어진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강박을 느끼는 것도 우리의 생존에 유리하지 않다. 행복을 느끼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리면 행복하지 못한 상태를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행복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거나 아예 행복하지 않겠다고 포기 선언을 해버리는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사람이 항상 행복을 느낄 수는 없다. 어떠한 사람이 항상 즐거운 기분만을 느낀다면 그것은 조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행복에 관한 명언들 중에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행복은 스스로 찾는 것이다', '행복의 파랑새는 이미 당신 곁에 있다' 등의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말로는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개개인마다 행복에 대한 정의도 다 다르기에 더욱 어렵다.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가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행복은 삶의 최종적인 이유도 목적도 아니고, 다만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법륜스님이 '삶의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한 것과 같이 행복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뒤집어야 하는 것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도록 프로그램되어있기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을 느끼지 않는 상태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그저 삶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상태가 불행한 상태보다 우월하다는 생각도 바람직하지 않다. 인간은 불행한 상태가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기분 좋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치유와 발전 성장이 일어난다. 결국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 모두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는 궁극적으로 나의 뇌가 나의 생존을 위해 명령하는 것이므로 감정의 파도를 있는 그대로 느껴보자. 인체의 호르몬이 서로 길항작용을 하듯이 쾌-불쾌의 느낌에 집중하여 현재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무언가 밸런스가 맞지 않고 내 삶에 빠진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자.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내 감정과 필요에 민감해지자. 내 감정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면 엉뚱한 것을 욕망하기 쉽다. 예를 들어 내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사람을 멀리해야 하는 상황에도 그 사람을 붙잡기 위해 집착적으로 더 노력하여 자신을 고갈시킨다거나 나에게 해로움을 주는 걸 알면서 술이나 다른 해로운 것에 의존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외로우면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을 찾아 위로를 받자.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우울하다면 평소에 내가 좋아했던 무언가를 찾아보자. 소유보다는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일상에서 소소하지만 자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좋다. 잠깐이라도 산책을 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과 포옹을 하자. 나를 갉아먹는 상황에서 멀어지고 나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과는 결별을 하자. 행복이 아닌 건강한 생존을 위한 나만의 공식을 만들어보자.
행복은 깊이 느끼고 단순하게 즐기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삶에 도전하고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능력에서 나온다
- 스톰 제임슨
무엇이 행복을 주는지 말하기는 퍽 어렵다. 가난도 부도 둘 다 지금껏 실패했으니까
-킨 허바드
행복의 추구는 가장 어리석은 말이다. 행복을 추구하면 절대 행복을 찾지 못할 것이다
-C.P. 스노우
미래를 좌지우지하겠다는 욕망을 버리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니콜 키드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