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아침 반려견과 함께 웅산에 오른다. 익숙한 길이지만, 산은 단 한 번도 같은 얼굴을 내민 적이 없다. 숲의 어느 아늑한 자리에 잠시 머무르면, 곤충들의 노래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까치의 울음이 그 사이를 유영하듯 비집고 들어온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화가 흐르는 듯하다. 그 소리 없는 교감은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며, 그 신비로움은 언제나 나를 멈춰 세운다.
숲은 고요하다. 그러나 그 고요는 정적이 아니라, 쉼 없이 움직이는 생명의 흐름이다. 땅속 뿌리들은 물을 나누고, 잎사귀들은 햇빛을 머금는다. 바람은 가지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소리를 전달한다. 나는 이곳에서 ‘역동적인 고요함’이라는 역설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그것은 멈춘 듯 흐르고, 흐르는 듯 멈춰 있는, 시간의 다른 얼굴이다.
이 역설은 곧 인간 존재의 은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 또한 겉보기에는 단조롭고 반복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수많은 사건과 감정이 교차하며 흘러간다. 숲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려 애쓴다. 웅산은 마치 “살아간다는 것”의 원형을 매일같이 보여주는 스승 같다.
웅산은 또 하나의 언어로 시간의 흐름을 가르쳐준다. 같은 길을 걸어도 나무의 색은 늘 다르다. 초록이던 잎이 어느새 누렇게 물들고, 능선에는 가을의 기운이 완연하다. 나는 이 변화를 바라보며 시간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시간은 직선처럼 앞으로만 나아가는 듯하지만, 자연 속에서는 순환의 형태로 드러난다. 봄은 여름을 낳고, 여름은 가을로 이어지며, 가을은 겨울을 거쳐 다시 봄으로 돌아온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직선을 걷는 듯 순환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흐름 한가운데서 나는 존재에 대해 묻는다. 시간은 무엇인가?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흐른다(Panta Rhei)”고 말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의 수”라 정의했다. 그러나 웅산에서 내가 경험하는 시간은 이론이 아니라 감각이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나뭇잎의 색과 바람의 결 속에 분명히 새겨진, 체험으로서의 시간이다.
오늘도 나는 웅산의 어느 모퉁이에 서 있다. 나무와 벌레, 새와 바람, 그리고 계절의 숨결이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합창을 이루는 자리에서. 그 합창 속에서 나는 내가 아주 작은 존재임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흐름 속에 꼭 필요한 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웅산은 변하지 않는 듯 매일 변하고, 나는 변하는 듯 결국 같은 나로 남는다.
그리고 오늘도 웅산에서 나만의 시간이 나에게 속삭인다. “멈추어라, 그러나 흐르라. 너는 이 고요 속에서 움직이고, 이 움직임 속에서 고요하라.”
나는 그 속삭임을 따라, 우주의 한 모퉁이인 이 지구 위에서, 역동적인 고요함과 빠른 세월의 흐름을 함께 호흡하며 지금, 이 순간이라는 선물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