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의 매일 반려견을 데리고 웅산을 오른다. 그 길목, 광석골 쉼터 인근 지역에는 들고양이들이 산다. 5년째, 나는 그곳에서 고양이들을 만나 사료를 나눈다. 사료를 나누는 정자 마루 가까이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같은 말을 건넨다. “양이야, 맘마 먹자.” 그러면 풀숲이나 철쭉덤불 뒤에서 고양이들이 고개를 내밀며 짧게 울음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항상 비슷하게 들린다. 장소도 같고, 시간도 비슷하고, 내가 내는 말도 같으니, 고양이들의 반응 또한 하나의 리듬처럼 들린다. 마치 우리가 함께 만든 일종의 합주 같기도 하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언어 이전의 방식으로 서로를 인식하고, 관계를 시작한다. 의미보다는 패턴이 먼저고, 감정보다는 순서와 리듬이 우선한다. 내가 가방에서 사료 봉지를 내려놓을 때면 울음은 조금 길어지고, 망설임과 다가옴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좁아진다. 어떤 고양이는 머뭇대고, 또 어떤 고양이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밥그릇으로 향한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반가움, 기대, 신뢰… 그러나 경험이 쌓일수록 단정할수록 오역은 깊어진다는 걸 배운다.
그래서 나는 내 해석을 지우려고 한다. 감정 대신, 행동의 순서를 기록한다. 나오기/머뭇/뒷걸음질, 첫소리의 길이, 다음 소리까지의 간격, 눈 맞춤의 지속 시간, 접근 각도... 감정이라는 추정값 대신, 반복 속에 나타나는 변화를 관찰한다. 그때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루틴의 힘이다. 같은 사람, 같은 그릇, 같은 자리. 반복은 불안을 덜고, 예측 가능성은 조심스러운 친밀감을 만든다. 나는 정해진 사료를 두고 한발 물러서며 그들의 선택을 기다린다. 먼저 다가오게 하되, 소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신뢰는 말보다 몸짓으로, 감정보다는 습관으로 쌓인다.
어느 날부터인가, 들고양이들은 내가 다가올 때뿐 아니라, 멀어질 때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밥을 먹기 전인데도 낮게 울거나, 먹은 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정자 근처에 머무른다. 가끔 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 소리에 고양이들 두세 마리가 내 근처에 머물며 관중이 되어 준다. 그들은 울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냥 나와 함께 그 시간의 공기를 들이쉬며, 같은 풍경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 관계의 기쁨 한편에는 불편한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정말 고양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 인간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사냥하거나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이 흐려지는 것은 아닐까? 들고양이들의 야생 본능을 약화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선의로 시작한 일이 그들의 생존에 되려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언제나 한 발 더 물러서게 된다. 마음은 앞서지만, 몸은 절제해야 한다는 걸 안다. 관계에는 거리감이 필요하고, 선의에는 책임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먹이를 주는 방식 하나하나에도 생태와 공원의 질서, 그리고 들고양이 스스로의 감각을 해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한다.
들고양이와의 관계는 단지 정서적 교류로 끝나지 않는다. 민원, 중성화, 청결, 생태계 유지… 관계가 깊어질수록 책임의 범위도 넓어진다. 그래서 나는 고양이들의 반응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어제와 얼마나 달랐는지, 어떤 고양이가 오지 않았는지, 내 마음의 변화는 무엇이었는지를. 기록은 감정을 검증으로 바꾸는 작은 다리가 되고 있다.
결론은 명확하다. 소리는 해석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리듬이다. 중요한 건 내가 먼저 그 리듬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다. 친밀함이라는 이유로 고양이들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고, 내 확신이 이들의 감각과 동네의 평온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 매일 같은 인사로 시작해, 같은 자리에서 한발 물러서는 습관은 그 조심스러움의 표현이다.
어쩌면 이 관계는 그렇게 충분한지도 모른다. 내가 만든 루틴이 그들의 불안을 잠시 멈추게 해준다면, 그 리듬 안에서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조심스럽고도 의미 있는 관계를 살아내고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