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공원에서 남태령까지,
노병들이 그린 하루

노병들의 동지애

by 이천우

서울대공원에서 남태령까지,

노병들의 하루


노병들은 조국의 바다를 지키던 청년장교 시절을 회고했다


푸른 숲 위로 노랑과 진홍빛이 겹겹이 얹힌 늦가을, OCS 68차 보급 동기생 아홉 명이 서울대공원에 모였다. 멀리는 아메리카에서, 가까이는 서울과 세종, 진해, 부산에서 모여든 얼굴들이었다. “이제는 다들 일흔”을 넘긴 노병들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 이들은 필승! 하며 만났다. 거수경례를 하며 웃음으로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이날만큼은 군데군데 주름이 엮어 온 세월보다 다시 만난 기쁨이 훨씬 더 또렷했다.

맑게 갠 하늘 아래 대공원 둘레길을 함께 걷고, 남태령 고개를 넘어 사당에 닿을 때까지, 그들은 오래도록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시간은 단순한 동기 모임이 아니라, 노년의 하루를 어떻게 ‘축제’로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 선물 같았다.


서울대공원 둘레길에서 다시 맞잡은 손

11월 9일 오전 11시, 서울대공원 입구에 동기들이 하나둘 모였다. 해군 OCS(Officer Candidate School) 68차 보급장교 동기들, 이제는 모두 일흔을 훌쩍 넘긴 노병들이지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초급장교 시절의 호명을 닮아 있었다.

둘레길로 들어서자, 한껏 물든 푸르름 위로 노랑과 진홍빛 단풍이 겹쳐진 숲이 펼쳐졌다. 낙엽이 바람을 따라 흩날리고, 호수 위에는 가을 햇살이 반짝였다. 누군가는 “이 풍경이야말로 진경산수(眞景山水) 아니냐”며 감탄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렇게 함께 걷는 것도 훈련이며 동기애다”라며 구령이 나올법한 분위기였다.

속도는 젊은 날처럼 맞추지 못해도, 보폭은 서로에 맞춰 조정했다. 한 사람의 걸음이 느려지면 자연스럽게 대열이 좁혀졌고, 누군가의 옛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면 다른 이들이 조용히 맞장구를 쳤다. 군대에서 함께 보낸 짧지 않은 4년, 그리고 흩어진 뒤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낸 긴 세월이 이 둘레길 위에서 다시 한 줄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막걸리와 소맥 사이로 흘러간 세월

두 시간 남짓 둘레길을 걷고 난 뒤, 우리는 선바위역 근처 메밀장터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는 막걸리 잔을, 또 다른 이는 소맥 잔을 들었다. 안주로는 뜨끈한 닭고기 세트가 올랐다. 술은 핑계일 뿐, 진짜 목적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마음을 풀어놓는 일이었다.


KakaoTalk_20251110_메밀식당.jpg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친구, 세종과 진해, 부산에서 버스와 열차를 타고 올라온 친구들 이야기가 차례로 이어졌다. “멀리서 이렇게 함께해줘서 고맙다”는 함영태 회장의 인사가 테이블을 돌 때마다, 왠지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나는 아직 멀쩡하다”며 넘기는 모습이 정겹고도 애틋했다.

시간이 멈춘 듯 느껴졌지만, 시계는 여전히 앞으로만 갔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한 하루만큼은 흐르는 시간이 아쉬울 만큼 충실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농담 속에 진심이 숨어 있었다.


남태령 고개를 넘으며 확인한 동지애

자리를 마무리할 무렵, 2차로 심영섭 동기가 쏘는데 한 동기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냥 남태령 고개를 걸어서 넘어가자.” 남태령 고개는 과천과 서초구 사당을 잇는 길로, 요즘은 차량이 주로 오가는 구간이다. 사람 발걸음은 드문 그 길을, 노병들은 다시 “행군 길”처럼 걷기로 했다.


프라타너스 잎과 은행잎이 두껍게 쌓인 고갯길 위를 터벅터벅 밟으며 걸었다. 자동차 물결이 쏟아지는 도심 한복판이지만, 낙엽이 쿠션처럼 깔린 좁은 길 위에서는 묘한 고요함이 흘렀다. “우리가 지금 과천에서 서울 서초까지 걸어 넘어가는 중이야”라는 말에, 모두가 한 번씩 발을 내려다보았다.


KakaoTalk_20251110_사당애서.jpg


예전 같았으면 당연하게 여겼을 거리지만, 이제는 각자의 무릎과 허리 상태를 먼저 떠올릴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라서 가능한 도전이었다. 남태령을 넘은 뒤 사당역 근처에서 뜨끈한 옹심이 수제비와 족발·수육 세트를 앞에 두고 다시 소맥 잔을 기울일 때, 우리는 알았다. 이 한 잔에 담긴 건 단지 술이 아니라, “아직 우리는 같이 걸을 수 있다”는 동지애의 의식이라는 것을.


내년을 기약하며

모임이 끝날 즈음, 서로의 인사는 단순했다. “아프지 말고, 내년에 다시 보자.” 복잡한 다짐 대신, 이 한마디에 모든 마음이 담겼다. 멀리서 온 친구들의 거리는 숫자로는 멀지만, 그 거리를 기꺼이 줄여온 세월이 있었기에 오늘의 재회가 가능했다.


이번 모임을 알뜰하게 기획한 동기회장의 리더십, 장소를 내어준 동기의 따뜻한 초대, 장소와 시간보다 사람을 먼저 떠올린 모두의 마음이 하루를 완성했다. 노년의 우정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서로의 체력을 고려해 보폭을 맞추고,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에서 자란다.


서울대공원에서 남태령 고개까지 이어진 이날의 발자국은, 결국 한 줄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함께 걸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을 붙들고, 그들은 내년의 재회를 마음속으로 예약해 두었다.


KakaoTalk_20251110_대공원 단풍길.jpg


오늘의 한 문장
“일흔의 노병들이 남태령을 넘을 수 있었던 건, 서로의 보폭을 맞춰 준 동기들의 사랑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OCS68

#가을동기모임

#서울대공원걷기

#남태령고개Trail

#시니어우정

#노년라이프

#WalkingWithFriends

#AutumnFoliage

#전우애

#MemoryWalk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유스티노회 경주 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