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삶

건전 재정과 건전한 가계

by 이천우

ㅡ빚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삶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수출로 살아가야 한다



한국 경제를 이야기를 할 때 “빚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말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맞지 않다. 한국은 일반정부 부채 기준 국가채무비율만 놓고 보면 OECD 평균보다 낮은 나라이면서도, 가계부채와 민간·공공을 합친 거시 레버리지(총부채 비율)는 상위권에 걸쳐 있는 나라라는 다층적인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제대로 보려면 막연히 불안해하기보다는 주요 지표를 차분히 짚고, 그 숫자들이 우리 삶과 다음 세대의 재정·금융 환경에 어떤 의미를 남기는지까지 따라가 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국가부채부터 보자. OECD가 집계하는 일반정부 부채 비율 기준에서 2023년 OECD 평균은 GDP 대비 110.5% 수준의 국가채무비율로 알려져 있다. 반면 한국의 일반정부 부채는 50% 안팎으로,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숫자만 놓고 보면 한국은 아직 재정 여력(fiscal space)이 남아 있는 편이다. 일본과 일부 유럽 국가들이 100%를 넘나드는 고부채 국면에 있는 현실과 비교하면 더 그렇다. 이 지점에서 “한국 재정은 즉각 위기다”라는 단정은 분명 과장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안도만 하기에는 이르다. 거시 환경과 인구 구조를 살펴보면 달라진다. 라인하트 교수의 저서『이번에는 다르다』가 던진 핵심 경고는 “위기는 반복된다”는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다. 부채가 한 번 제도와 생활 속에 깊이 들어오면, 어느 순간부터는 줄이는 것 자체가 정치·사회·제도적으로 어려워진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오늘날 많은 선진국들은 그 구조적 장벽 앞에 서 있다.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연금, 의료, 돌봄 같은 복지성 경상지출은 줄이기 어렵고, 재정지출의 경직성은 커진다. 긴축 의지보다 인구 구조와 복지 제도가 지출의 방향을 밀어붙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국도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의 국가채무비율이 OECD 평균보다 낮다는 사실은 ‘현재의 안정감’에 가깝다. 그러나 초고속 고령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는 위험이 현재 숫자보다 미래의 지출 경사, 즉 연금·의료·돌봄 지출의 증가 속도에서 먼저 나타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재정의 승부처는 “빚을 줄이자”라는 구호에 그칠 것이 아니라,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성장잠재력을 어떻게 다시 구축할 것인가에 두어져야 한다. 재정지출의 우선순위를 재정렬하고, 세수 기반을 넓힐 잠재성장률 제고를 함께 설계하지 못하면, 국가채무는 오래된 구조적 재정적자로 고착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계부채로 눈을 돌리면 분위기가 훨씬 팽팽해진다. 국제 비교로부터 한국의 가계부채/가처분소득 비율(가계부채소득비율)이 상위권에 속한다는 지적은 반복돼 왔다. 다른 방식의 지표에서도 한국 가계부채가 GDP 대비 높은 수준이라는 분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숫자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채의 구성과 리스크 구조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주택을 중심으로 축적되었고, 가계 자산의 상당 비중이 부동산에 쏠려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택시장 조정과 금리 수준이 함께 흔들릴 때 가계·금융기관·실물경기가 동시에 압력을 받는 자산가격·부채 연쇄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금리 구조와 상환 구조의 문제도 있다. 변동금리 비중이 과거보다 낮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적지 않은 가계가 변동금리부 대출에 노출돼 있다는 진단이 많다. 정책금리가 높은 구간에 오래 머물면 가계부채는 곧바로 가처분소득 감소, 민간소비 위축, 연체율 상승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가계부채는 “개인이 돈을 많이 빌렸다”로 끝나는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금리 정책, 주택시장 구조, 소득 분포, 노동시장 유연성이 한꺼번에 얽힌 거시건전성(macroprudential) 리스크로 봐야 한다.


이쯤에서 보면, ‘가계와 국가’는 서로를 자극하는 이중 부채 구조엮여있음을 알 수 있다. 가계가 이자 부담 때문에 지갑을 닫으면 민간소비가 위축되고, 이는 곧 내수 경기 둔화와 세수 기반 약화로 이어진다. 그러면 정부는 경기 방어와 취약계층 보호를 위해 더 큰 규모의 경기대응적 재정지출(counter-cyclical fiscal policy)을 요구받는다. 반대로 재정이 확장되더라도 그 재정지출이 생산성 향상과 성장 기반 강화로 이어지지 못하면, 미래의 국가채무 부담은 더 커지게 된다. 한쪽을 조이면 다른 쪽이 저절로 좋아지는 문제가 아니다. 부채의 시대에는 재정·통화·거시건전성 정책의 동시 설계가 필요하다.


정부의 정책도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강화는 “대출을 줄이자”가 아니라 “소득 대비 상환능력 원칙을 지키자”는 신호다. 여기에 금리 상승을 가정해 상환능력을 점검하는 스트레스 DSR 도입 논의는, 한국 사회가 ‘빚을 지는 방식’ 자체를 더 보수적으로 바꾸라는 요구에 가깝다. 당장의 신용공급 축소와 체감 불편은 커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가계부채의 급격한 조정을 막는 연착륙(smooth deleveraging)을 위한 안전장치가 될 여지가 있다. 물론 갑작스런 대출 규제는 혼란을 가중시킨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더 있다. 부채가 늘어나는 시대일수록 재정은 더 엄격한 재정 규율(fiscal discipline)을 지켜야 한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 재원을 조달하는 문제는 결국 “표를 얻기 위한 이전지출인가, 경제·사회 시스템을 버티게 하는 투자지출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전 국민에게 넓게, 빠르게 나눠 주는 보편 현금성 지원은 설명이 쉽고 즉각적인 정치적 호응을 얻는다. 그러나 재정은 무한하지 않고, 한 번 구조화된 지출은 줄이기 어렵다. 이때의 비용은 미래 세대의 세금 부담과 다른 필수지출의 축소, 즉 세대 간 재정 부담 전가귀결된다.



그렇다고 복지 지출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경제적·사회적 취약계층에게는 더 두껍고 더 정밀한 지원이 필요하다. 소득·자산·건강·돌봄 위험이 겹쳐 있는 계층을 정확히 찾아, 최저생계 보장·주거 안정 정책·채무조정 프로그램·금융교육 및 상담·고용서비스·직업훈련을 패키지로 묶는 접근이 더 효과적이다. 포퓰리즘형 확장재정이 “많이, 넓게, 빨리”에 기대는 정책이라고 한다면, 제대로 설계된 복지는 “필요한 사람에게, 충분히, 지속가능하게”를 지향하는 올바른 정책이라 할 수 있다. 둘 다 재정을 쓰지만, 하나는 단기 정치적 효용, 다른 하나는 장기 사회적 수익률을 지향한다.


숫자와 제도 뒤에는 늘 삶의 장면이 따라온다. 가계가 소득의 상당 부분을 이자와 원금 상환에 쓰는 사회에서는, 줄어드는 것은 외식과 여행 같은 단기 소비만이 아니다. 건강관리, 자기계발, 이직·전직 준비 같은 인적자본 투자도 함께 줄어든다. 더 나아가 자녀 세대의 진로 선택 폭도 좁아질 수 있다. 가계부채는 현재의 금융 부담이면서 동시에 다음 세대의 기회 구조와 사회이동성을 조용히 줄이는 메커니즘이 된다.


국가부채도 마찬가지다. “후세가 세금으로 갚는다”는 말은 맞지만, 절반만 맞다. 중요한 것은 재정지출의 용도와 생산성이다. 단기 인기성 이전지출과 효율성이 낮은 사업에 쓰인 부채는 미래의 순수한 부담이 된다. 반대로 교육, 과학기술, 인프라, 산업 전환, 돌봄·보육 체계 같은 장기 생산성 기반에 쓰인 부채는 미래 세대의 세수 여력과 성장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국가부채 논의의 핵심은 결국 “얼마를 쓰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쓰고, 그 지출이 미래의 상환능력을 얼마나 키우느냐”에 있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한국의 부채 문제는 한 문장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정부부채는 아직 상대적으로 낮지만, 고령화라는 장기 재정 리스크가 있고, 가계부채는 주택 편중·변동금리 비중·소득 대비 과다 레버리지라는 구조적 취약성이 크다. 그래서 해법도 두 갈래로 동시에 가야 한다. 가계는 상환능력 원칙 아래 대출 증가 속도를 조절하면서, 부채 구조를 개선하는 연착륙이 필요하다. 국가는 고령화 시대의 지출 구조를 재편하고, 노동·산업·교육·혁신 정책과 결합한 투자로 잠재성장률을 복원하는 개혁을 통해 “빚을 줄일 수 있는 체력”을 만들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빚을 절대 지지 말자”가 아니다. “빚을 지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거시·미시적 체력을 지금 키우자”로 가야 한다. 국가에게 그 체력은 생산성과 제도 개혁이고, 가계에게 그 체력은 안정적인 현금흐름과 위험 분산, 과도하지 않은 레버리지가 된다. 그리고 사회 전체의 체력은 다음 세대에게 부담을 미루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세대 간 형평성에 대한 합의가 된다.


그래서 한국이 선택해야 할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빚을 줄이자”가 아니라, “빚을 줄일 수 있는 구조의 나라와 가계를 만들자.” 그 설계의 책임은, 이미 높은 부채 지표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 우리 세대가 피할 수 없는 몫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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