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하여 문화’를 위하여

위하여 문화

by 이천우

‘위하여 문화’를 위하여


남녀 노소가 함께 위하여



연말이면 모임이 잦아진다. 송년회, 동창회, 동호회, 직장 모임까지 일정표가 금세 빼곡해진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누군가 소맥 잔을 들고 짧은 덕담을 건네고, 모두가 “위하여!”를 외치며 잔을 비운다. 이 ‘위하여 문화’는 확실히 분위기의 온도를 끌어올리는 묘한 힘이 있다. 낯선 사이도 그 순간만큼은 같은 편이 된 듯, 웃고 떠들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한 장치다.


나는 이 문화를 피하기보다 즐기려 한다. “위하여”는 별 설명 없이도 분위기를 하나로 모으는 힘이 있다. 선창자가 덕담을 외치고, 모두가 화답하는 그 순간은 작은 연대 의식처럼 느껴진다. 짧은 문장 속에 서로를 향한 인정과 격려, 그리고 함께 견뎌낸 시간에 대한 고마움이 스며 있다. “올해 고생한 우리 모두를 위하여”, “새해엔 건강하게 9988을 위하여”, “오늘만큼은 편하게 즐기기 위하여.” 이런 말들이 오갈 때, 나는 그 짧음 속의 따뜻함이 참 좋다. 그 정서는 결코 가볍지 않고, 오히려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려 준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가 항상 편하지만은 않다. 체질적으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맥 한 잔만 넘어가도 얼굴이 화끈해지고,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마치 몸이 '이제 그만하세요!'라고 항의하는 듯해진다. 그런데도 모임의 분위기는 으레 원샷과 몇 잔 더 합시다, 로 기울곤 한다. 나는 그 틈에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내 몸을 지키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조용히 갈등한다. 즐겁지만 불편하고, 따뜻하지만 어딘가 조심스러운 자리다. 나는 그 경계 위에 서서 고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장 자주 들리는 덕담은 “건강을 위하여”다. 그런데 이 말은 늘 웃음의 포인트가 된다. 과음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우리는 건강을 외치며 술잔을 비운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이 장면은 유쾌하면서도 어딘가 허탈하다. 나 역시 그 모순을 알면서도 잔을 들고 웃는다. 기꺼이 그 아이러니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모순이지만, 다 함께 하는 모순은 묘하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문화를 없애자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조금만 다듬는다면, ‘위하여’는 지금보다 더 건강하고 따뜻한 언어로 오래 남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요즘 나는 이 ‘위하여’를 술의 속도에서 분리하려고 한다. 핵심은 반복되는 잔이 아니라, 구성원들 간에 나누는 감정과 그 분위기 때문이다. 덕담을 다양하게 바꿔보는 시도도 해봤으면 좋겠다. “무사 귀가를 위하여”, “내일 속 편함을 위하여”, “각자 페이스를 위하여”, “다음 더 진한 만남을 위하여.” 이 말은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들 아닌가. 짧고 명료하지만, 이 문장들은 모임의 흐름을 ‘강요’에서 ‘배려’로 바꾸는 것이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분위기에 참여할 수 있는 장치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논알코올 맥주나 탄산수를 기본 테이블에 올려 둔다. ‘마실 사람만 시켜’가 아니라, ‘같이 마시되 각자 방식으로’라는 배려가 필요한 시대다. 잔을 비우는 방식도 “원샷”보다 “한 모금”으로 바꾸자는 합의가 있으면 좋겠다. “건배했으니 이제 홀짝!”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선 어려울 수 있지만, 선창자가 덕담의 말투를 조금씩 바꾸면 훨씬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 시작부터 높은 도수의 술을 권하기보다, 물과 안주로 흐름을 천천히 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2차는 선택”이라는 문장을 초반에 미리 말로 정리하는 일도 중요하다. 강제된 2차만큼 피곤한 게 없다는 걸, 우리는 이미 여러 번 경험했으니까. 참석자 역시 자신의 주량과 상태를 명확히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은 한잔만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분위기를 깨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존중의 한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위하여’는 단순한 술 문화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를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말이다. 힘든 삶의 한가운데서도 잠깐은 서로 기대면서 웃고 싶은 마음, 짧은 문장으로 안부를 묻고 동료애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담는 좋은 기회이기에. 나는 '위하여'에 내포된 따뜻한 본질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 문화를 잘 지키되, 술 마시는 방식은 조금 달라졌으면 한다.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위하여' 자리 그 사이 어딘가에서 웃고, 망설이고, 참여하고, 때로는 빠져나오고 싶어 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잔을 들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각자 페이스를 위하여.”


삶을 축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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