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밥상은 의지보다는 장치로

노후 밥상의 안전 문제

by 이천우

노후 밥상은 의지보다는 장치로


노후 오붓한 밥상을 꿈꿨는데...


엊그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야채가게에서 고구마 한 봉지를 샀다. “오늘은 이걸 맛있게 쪄 먹자.” 고구마를 씻고 냄비에 담아 불을 켠 뒤, 소파에 ‘잠깐’ 기대며 누웠다. 그 ‘잠깐’이 문제였다. 눈을 떴을 땐 집 안에 탄 냄새가 가득했고, 냄비는 새까맣게 타 있었다. 물에 담가도 그을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내는 말없이 창문을 열고, 말없이 행주를 빨다 결국 터뜨렸다. “당신은 왜 그래. 불 켜고 왜 소파에 눕느냐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런 일을 단순히 ‘내가 덜렁댔다’고 넘길 수는 없다. 노후에 접어들며 반복되는 패턴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잠깐’이 정말 짧았고, 몸이 먼저 움직였으며, 불 앞에서도 졸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제자리를 찾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사고는 더 쉽게 발생하고, 그 뒤처리는 훨씬 더 복잡하다. 냄비만 타는 게 아니라 집안 공기가 타들어 가고, 급기야 부부 사이에 험한 말까지 터지게 만든다.

우리 집 밥상은 늘 애매한 상태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요리를 즐기지 않는 둘이 만나, 끼니마다 “자취생처럼 적당히 해 먹자”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졌고, 그 말은 곧 서로 물러서는 신호가 되었다. 아침은 두유나 시리얼, 요거트 한 컵으로 때우고, 점심은 대부분 외식으로 해결한다. 저녁도 삶은 누룽지나 햇반에 김치로, 거기다 과일이나 견과류 몇 알로 끝날 때가 많다. 영양제 몇 알로 부족한 균형을 채우려 하지만, 식탁 위 풍경은 언제나 자취방 시절의 그 허전함을 닮아있다. 게다가 엊그제 같은 일이 생기면, '집에서 해 먹자'는 말은 점점 더 입 밖에 내기 어려워진다. 그 이유는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번 사 먹을 수도 없다. 외식은 번거롭고, 식당의 익숙한 반찬은 금세 물린다. 무엇보다 ‘내가 나를 먹인다’는 기본 감각이 흐려지는 게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의 손에 내 식사를 온전히 맡긴다는 것은, 나의 어떤 중심이 흔들리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부엌과 식당 사이에 어정쩡하게 걸쳐 있는 기분이 든다. 집에서 해 먹자니 불안하고, 밖에서 사 먹자니 허전하다. 결국 이건 요리의 능력이 아니라, 노후에 ‘식생활을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다.



그럼에도 아침 달걀후라이는 여전히 붙잡고 있다. 아내가 구워주는 달걀 하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하루를 우리 손으로 시작했다는 실감나는 일이기도 하다. 조리 시간은 짧지만, 그 짧음조차 때로는 불안의 근거가 된다. 팬 위에서 들리는 '치익' 소리에, 마음속에서는 '또 태우면 어쩌지' 하는 긴장이 먼저 올라온다. 그래서 어떤 날은 빵집에서 샌드위치와 식빵을 사 와 냉장고에 넣어두기도 한다. 그 편이 더 안전하게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게으름의 표현이 아니라, 오늘 내가 나를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솔직한 판단이다.


나는 이제야 인정하게 됐다. 노후의 조리는 더 이상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정신 차리자'는 결심은 쉽게 무너지고, 반복되는 실수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결국 버텨야 할 것은 의지가 아니라 절차이고, 감정을 대신할 것은 장치다. 그래서 우리는 작지만, 실효성 있는 규칙 세 가지를 정했고, 그걸 주방 입구에 눈에 띄게 붙여두었다.

첫째, 불을 켜는 즉시 타이머를 켠다. 고정된 도구 하나로 시간을 재고, 타이머 없이는 불을 켜지 않기로 했다. 타이머는 기억의 보조장치이자 사고의 방지선이다.


둘째, 불이 켜진 채로 주방을 떠나지 않는다. 거실로, 소파로 가지 않는다. 눕고 싶으면 불을 끄고 눕는다. 다시 하려면 다시 불을 켠다. 이 한 줄만 지켜도 많은 사고가 줄어든다.


셋째, 짧은 메뉴와 비상식을 준비한다. 오래 끓이는 요리는 욕심내지 않는다. 샌드위치, 데우기만 하면 되는 국, 손질된 샐러드를 냉장고에 늘 확보해 둔다. 이건 포기가 아니라, 안전을 위한 보험이다. 사람이 무리하는 건 대안이 없을 때다.


이렇게 규칙을 붙여두고 나서야, 나는 내게 묻게 됐다. 왜 나는 ‘내 밥’을 이토록 지키고 싶어하는가. 젊은 시절에는 주말마다 부부가 함께 요리하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이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 시간은 여유이자, 애정이자, 어떤 작은 성취였다. 사실 우리 부부는 함께 정년퇴직을 했기에, 나는 부부 둘이서만 오붓하고 멋있게 하루하루를 보내야지, 맛있는 요리도 하며, 라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런 환상은 바로 깨져 버렸다. 누가 식사 당번을 할 것인가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각자 편한 방식대로 살기로 했다. 더욱이 노후의 밥상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라 구조로 정착되고 있다. 노후의 하루가 그날을 무사히 넘기는 생존의 기술로 정착되었고, 그 기술은 감정보다 습관으로, 취향보다 안전으로 굳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내 또래 노후세대 누구나 겪는 구조적 변화가 아닐까 싶다. 집중력은 줄고, 회복은 느려지고, 부부는 서로의 실수를 감당할 여유가 줄어든다. 그럼에도 주방은 여전히 젊은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 가스불은 빠르게 켜지고, 끄는 건 여전히 사람 손에 달려 있다. 그러니 노후에 맞는 주방 구조, 타이머나 차단기 같은 안전장치가 절실하다.


나는 아직도 완벽하지 않다. 타이머를 켜놓고도 ‘잠깐만’이라는 유혹이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땐, 새까맣게 탄 냄비를 떠올린다. 탄 냄새로 가득했던 집안과, 그날 아내의 표정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냥 불을 끈다. 오늘은 배고픔이 아니라 ‘방심’이 내 상대임을 확인한다.

노후에는 사 먹는 것도, 해 먹는 것도 불편한 시기가 찾아온다. 그렇다고 식사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내 밥상을 지킨다는 건 더 이상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지속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자, 스스로의 생활을 지탱하는 일상적 기둥이다. 그래서 나는 다짐 대신 습관을, 결심 대신 구조를 선택했다. 의지에 기대기보다는 반복 가능한 안전망을 만들기로 했다. 노후의 밥상은 그렇게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나는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만큼만 안전하게 살아가는 일. 그것으로 충분하다.


노후엔 환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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