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성인의 조용한 순명과 강생(육화)의 신비

요셉 성인의 역할과 순명

by 이천우

요셉 성인의 조용한 순명이 강생(육화)의 신비를 살게 합니다


희망을 주는 산타여! 인류에게 빛을 주소서.



12월 20일 오후 5시, DCU 유스티노 캠퍼스 신학교 경당에서 한중친선협회 회원들과 함께 토요 특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글은 이날 지도신부님께서 회원들을 위해 전해 주신 강론 말씀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강론의 핵심은 분명했습니다. 요셉 성인은 화려한 말로 자신을 증명한 사람이 아니라, 말없이 가족을 지킨 사람이며, 그 침묵과 순명이 강생(육화)의 신비를 현실 속에 붙들어 준 힘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강생(육화)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살과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비는 머리로만 이해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직장에 나가고, 밥을 짓고, 길을 걷고, 집을 지키고, 두려움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바로 그 구체적인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 그것이 강생(육화)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가 삶으로 내려오려면 누군가의 손이 필요합니다. 요셉 성인은 그 손이 되신 분입니다.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빈자리를 채우는 손, 가족의 안전을 위해 묵묵히 움직이는 손입니다.


요셉 성인의 겸손은 마리아 앞에서 먼저 드러납니다. 요셉 성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상대를 상처 내는 길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이 말하듯 “조용히” 물러나려 했던 마음에는 판단을 유예하는 품이 있습니다. ‘내가 다 안다’는 태도 대신 ‘내가 지금 다 모른다’는 겸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늘 빠르게 결론을 내립니다. 누군가를 단정하고 재단하며, 그 사람을 내 기준으로 평가하려 합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그 속도를 늦추신 분입니다. 그 느림이 사람을 살리고, 그 멈춤이 마리아를 지켰습니다. 겸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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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오자, 요셉 성인은 말을 늘리기보다 자신을 내어놓는 쪽을 택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라는 말씀 앞에서, 요셉 성인은 설명을 더 요구하기보다 순명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순명은 감정이 편안할 때만 가능한 태도가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어도 그 두려움이 내 결정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태도입니다. 요셉 성인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움직이셨습니다. 그 짧은 동작 하나가 강생(육화)의 신비를 ‘말’에서 ‘삶’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신비는 그렇게 누군가의 작은 ‘일어남’으로 시작되는 법입니다.


요셉 성인의 성실은 더 거친 자리에서 빛납니다. 아기를 해치려는 위협 앞에서 요셉 성인은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를 데리고 밤길을 떠나 이집트로 가셨습니다. 여기에 영웅적인 과장은 없습니다. 한 사람의 가장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내리는 현실적 결단이 있을 뿐입니다. 밤에 떠난다는 것은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움직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요셉 성인은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위험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으시고, 해야 할 일을 하신 분입니다.


낯선 땅에서의 하루하루는 기도만으로 버티기 어렵습니다. 잠자리를 마련하고, 먹을 것을 구하고, 마리아가 지치지 않게 살피고, 아기 예수님이 놀라지 않도록 품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크고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작은 책임들입니다. 요셉 성인은 그 작은 책임을 끝까지 다하셨습니다. 요셉 성인의 말없음이 차갑지 않은 이유는, 그 안에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따뜻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사랑이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요셉 성인의 침묵을 신학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셉 성인의 침묵은 표현하지 못함이 아니라, 자기 과시를 멈추는 침묵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자유를 지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속에서 진행되도록 이끄시는 신비입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셉 성인을 통해 예수님께서 한 가정 안에서 보호받고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강생(육화)이 ‘몸을 취하심’이라면, 그 몸은 누군가에게 안겨야 하고, 누군가에 의해 길 위에서 지켜져야 합니다. 요셉 성인은 그 지킴의 자리에서 하느님과 협력하신 분입니다. 신비는 위에서 내려오지만, 그 신비가 머무를 자리는 인간의 순명으로 마련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요셉 성인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음을 느낍니다. 치열한 각자도생의 현실에서 사람들은 먼저 자기 몫을 지키려 합니다. 그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커질수록 우리는 쉽게 교만해집니다. 내 삶만 급해지고, 타인을 돌볼 여유가 줄어들고, 공동체의 온도는 빠르게 식어가기 마련입니다. 요셉 성인은 그 반대 방향을 보여 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중심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맡기신 관계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요셉 성인의 겸손은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눈에 확 띄는 조명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작은 등불 같은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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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를 마치고 경당을 나서는 길에 저는 제 신앙의 습관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종종 하느님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 성인은 설명보다 실천을 택하신 분입니다. 논리보다 책임을 택하신 분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말을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사람과 하루를 더 성실히 지키는 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셉 성인의 겸손은 저를 작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서야 할 자리를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중심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고, 저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관계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자리입니다.


성탄을 준비한다는 것은 예쁘게 장식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제 안의 교만을 조금 덜어내고, 제 손을 누군가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내미는 일입니다. 요셉 성인처럼 큰 소리 없이, 그러나 뒤로 빠지지 않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강생(육화)의 신비는 오늘도 그렇게 우리 곁에 머무는 신비입니다. 누군가의 조용한 순명 덕분에 가능한 신비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글을 한중친선협회 회원들과 함께 나누며, 각자의 자리에서 요셉 성인의 조용한 순명을 조금씩 살아 보려는 마음을 함께 모으고자 합니다.


결론입니다. 요셉 성인의 겸손과 성실은 강생(육화) 교리가 삶으로 내려오는 통로입니다. 강생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살과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는 저절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고, 판단을 늦추고, 맡겨진 이를 지키며,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낼 때 비로소 ‘교리’가 ‘생활’이 됩니다. 요셉 성인은 바로 그렇게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협력하신 분입니다. 말로 앞서지 않고 조용히 순명하여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지키고, 성가정을 세우며,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계신다는 진리를 하루하루의 현실로 붙들어 주신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짐합니다. 요셉 성인을 본받아, 매일 한 가지라도 실천하겠습니다. 큰 결심이 아니라, 오늘 내 앞에 놓인 한 사람을 살리는 말 한마디, 미루지 않고 해야 할 책임 하나, 공동체의 온도를 조금 높이는 작은 행동 하나를 선택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루에 한 걸음씩, 강생(육화)의 신비를 제 삶 안에 살아 있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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