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는 신을 속인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바위는 언제나 정상에 닿기 직전에 굴러 떨어지고, 그는 다시 그것을 밀어야 한다. 끝날 수 없는 반복, 무의미해 보이는 노동. 그러나 이 신화는 단순한 형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지닌 부조리와 그 끝없는 물음을 고스란히 상징한다.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 이야기를 새롭게 읽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찾지만, 세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 속에서 갈망이 부딪히며 ‘부조리’가 탄생한다. 그러나 카뮈는 시지프를 절망에 빠진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는 시지프를, 자기 운명을 껴안고 끝내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인간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그 말은, 반복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스스로의 존엄을 다시 세우는 태도였다. 삶이 비록 무의미해 보여도, 그 무의미 속에서 내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저항이며, 가장 아름다운 승리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물음을 만나게 된다. 신정론(Theodicy). 전능하고 선한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에 악과 고통이 있는가? 이 질문은 너무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선명하게 울린다.
욥기의 욥은 이유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잃는다. 자녀, 재산, 건강, 심지어 친구들마저 그를 오해한다. 그러나 욥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도 그는 하느님을 붙든다. 그리고 하느님은 결국 그 믿음에 응답한다.
시지프와 욥.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두 사람. 그러나 고통 앞에서 보이는 태도는 놀랍도록 닮아있다. 시지프는 끝없는 형벌을 자각하며 그것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고, 욥은 신의 침묵 속에서도 끝끝내 믿음을 내려놓지 않는다. 둘 다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절망 대신 '존엄'이 있다.
신정론은 고통을 신앙으로 해명하려 한다. 고통은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비롯되었거나, 영혼의 성숙을 위한 여정이라 말한다. 반면 시지프의 신화는, 신이 없더라도 인간은 스스로 고통을 견디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방식은 다르지만, 질문은 같다.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바위를 밀고 있다. 때론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되풀이되는 상실 속에서, 우리는 ‘왜 나인가’라는 질문 앞에 무너질 듯 서 있다. 하지만 신이 응답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침묵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욥처럼 하느님을 놓지 않거나, 시지프처럼 자신의 운명을 안고 가야 한다. 중요한 건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도 나만의 ‘의미’를 새겨 넣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다움이며, 신이 존재한다면, 가장 기뻐할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