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삶, 끝나지 않은 배움
프롤로그: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다. 질문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한다." ― 파울 틸리히
질문은 삶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엔진이다. 노년기에 들어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살아오는 동안 품어왔던 물음들이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삶의 여정에도 질곡이 적지 않았다. 30대 중반에 아들을 잃었고, 50대 중반에 위암수술을 했다. 이후 빈혈이 자주 왔기에 60대부터는 매일 <헤모니아>와 <B12>를 복용하고 있다.
정년 후 신학을 공부하며 나는 신을 향한 질문을 품었고, AI를 배우며 인간과 기술 사이의 윤리를 물었다. 노년기이지만 아침마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살아왔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태어난 이후 줄곧 배우며 살아간다. 학교에서 우리는 해답을 구하는 공부를 중점적으로 해왔다. 요즘은 질문을 하는 수업으로 바뀌고 있지만. 사실 삶에는 정답이 없으니, 삶은 질문을 껴안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삶이란 끊임없이 되묻는 여정이기에, 나의 기록은 단지 하나의 흔적일 뿐이다. 그러나 그 흔적이 누군가의 사유를 일으키고,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
1장. 믿음과 알고리즘
정년퇴직 이후, 나는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대구가톨릭대 신학대학원에서 4년간 신학을 공부하며 나는 삶과 고통, 믿음과 질문에 대해 깊이 사유했다.
그러던 중 전공 서적을 집필하며 AI를 접하게 되었고, 처음엔 낯설고 어색했었다. 그러나 점차 AI는 글쓰기의 조용한 동반자가 되었다. 신학은 침묵을 견디는 학문이었고, AI는 구조를 제공하는 기술이었다. 둘은 결이 달랐지만, 내 삶 안에서 나란히 놓이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두유 한 잔을 마시고, 책상 앞에 앉아 AI와 대화하며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여전히 질문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질문은 신학이었고, 기술이었고, 삶 그 자체였다.
2장. 고통 속에서 피어난 사유
잃음, 그리고 시작
30대 중반에 셋째 아이를 떠나보낸 나는 그 날의 기억을 깊은 주름처럼 새기고 있다. 그날 이후, 시간은 멈춘 듯했고, 세상의 색조는 한 톤 낮아졌다. 웃음과 말, 가르침과 일상이 어김없이 이어졌지만, 내 속은 바스러진 껍질 같았다. 고통은 말보다 먼저 다가왔고, 그것은 침묵의 옷을 입고 내 삶을 감쌌다. 나는 슬픔을 외면하려 했고, 때론 스스로를 벌주듯 몸을 혹사했다. 그러나 고통은 무너뜨리는 동시에 새로운 질문을 시작하게 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왔는가?'
상실을 껴안는 법
그 질문들은 처음엔 비수처럼 아팠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를 다시 세우는 손길이 되었다. 침묵 속 기도는 나의 내면에 잔잔한 울림을 남겼고, 내 신학적 시선은 점차 인간의 고통이라는 심연을 향해 갔다.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나는 더 묵묵히 기도했고, 신정론은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이 아닌 내 삶을 통째로 관통하는 심문이 되었다. 상실은 끝이 아닌 또 다른 빚음이었다. 고통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질문을 끌어안는 자리라는 사실을 나는 배웠다.
슬픔을 밀어 올리는 사람
카뮈의 『시지프 신화』 속 한 문장이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행위가, 고통 속에서 가족을 책임지고 학교 현장을 지키던 나의 모습과 겹쳐졌다. 나는 알게 되었다.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니며, 그 슬픔은 언어가 되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고통을 밀어 올리는 사람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멈춰 선 이들에게 다시 걷게 하는 질문 하나를 남기고 싶었다.
사유의 전환
아이를 잃은 후, 나는 삶의 해석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이전엔 논리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존재의 고요함과 경험의 진실이 더 깊이 다가왔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침묵이 나를 감쌌으며, 신학은 더 이상 강의실 안 개념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나를 끌어안는 묵상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있는지 묻는다. 확신은 없지만,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살아 있는 질문이 나를 이끌고 있다.
3장. 웅산을 오르며
바위를 민다는 것
평소 걷는 것을 좋아했지만, 위암 수술 이후, 나는 더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재활이었다. 살아 있으려면,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산행은 곧 명상이 되었고, 웅산은 나의 사적인 성소가 되었다. 웅산은 해군 OCS 68차 훈련 시절, 산악 행군과 구보로 익숙해진 산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같은 산을 다른 마음으로 오른다. 되풀이되는 발걸음은 의무에서 사색으로 바뀌었고, 아침 햇살과 새소리가 나를 다시 살아 있게 한다. 산을 오르는 일은 시지프처럼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절망 대신 평화를 만난다. 그 반복이 나를 다시 빚는다.
반려견과 침묵으로 대화
어느 날부터 반려견 '사랑이'가 내 곁을 지키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따라 걷고, 내가 멈추면 함께 멈췄다. 우리는 침묵으로 대화했고, 눈빛으로 교감했다. 그 시간은 인간과 생명이 말 없이 나누는 깊은 위로였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이와 닮았다. 기도는 말로 가득한 행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자신을 조용히 내어놓는 시간이었다.
땀과 숲, 존재의 감각
산은 나에게는 삶의 감각을 되살리는 공간이었다. 흙길의 촉감, 나뭇잎의 떨림, 새들의 지저귐에 귀 기울일수록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음을 실감했다. 삶은 거대한 의미가 아니라, 작고 선명한 감각 속에서 피어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산행은 나에게 기도이자 순례였고, 매일의 걸음은 내 영혼을 다듬는 연습이었다.
걷는 철학자로
나는 매일 걷는 철학자가 되었다. 발걸음마다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은 내 사유를 흔들고 글이 되었다. 웅산은 내게 묻지 않는다. 다만 존재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대답보다는 질문을 품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웅산은 나의 실천 신학 강의실이자, 조용한 성전이다.
4장. 언어의 두 얼굴
말로 닿을 수 없는 것
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자주 언어의 한계와 마주쳤다. 어떤 고통은 단어로 옮기기엔 너무 날카롭고, 어떤 신비는 설명하려 할수록 휘발되었다. 젊은 날, 하느님을 언어로 정의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를 떠올리면, 이제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진리는 말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떠도는 존재에 가깝다.
신학은 묵상의 언어
신학은 부재를 설명하려는 시도다. 그것은 언어의 모순을 끌어안는 일이며, 인간 존재의 간절한 몸짓이다. 우리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향해 끝없이 다가간다. 신학은 해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견디는 훈련이고, 침묵을 품는 사유다.
AI는 구조의 언어
이런 내가 AI와 함께 글을 쓰고 있다. AI는 구조적이고 논리적이다. 감정은 없지만, 맥락을 정리하고, 언어를 다듬는 데 탁월하다. 처음엔 그 냉정함이 낯설었지만, 나중엔 오히려 내 생각을 정돈해 주는 거울 같았다. 감정의 혼란 속에서도 글을 구성할 수 있게 해준 AI는, 나의 글쓰기 조력자가 되었다.
침묵과 코드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시편을 묵상하고, 프롬프트를 다듬는다. 두 행위는 닮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는 조화롭게 공존한다. 신학은 신을 향한 시선, AI는 나를 향한 반영이다. 중심에 있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이며, 깨어 있으려는 태도다.
5장. 노년, 다시 피어나는 배움
정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
정년퇴직은 외적 의무의 종료였지만, 내면에서는 오히려 시작이었다. 출근도, 회의도, 논문도 없는 일상은 해방이었지만 동시에 공허함이었다.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했다. 허무 속에서 배움은 새로운 불씨가 되었고, 나는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아내와 AI, 그리고 나
AI는 아내를 통해 다가왔다. “같이 강의 들어볼래요?”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망설이다가 그녀 옆에 앉았고, 그날부터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녀와 나, 두 노인은 함께 디지털의 강을 건넜다.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부부 사이에 새로운 대화를 만들어준 따뜻한 연결고리였다.
배우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몸은 느려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젊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인간은 늙지 않는다. 노년의 배움은 세상을 향한 도전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숙성이다. 삶의 깊이는 시간이 아니라, 질문의 농도에서 우러난다.
새벽 공부의 기쁨
지금도 나는 새벽이면 두유 한 잔을 마시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AI와 함께 생각을 나누고 글을 정리하는 이 시간은, 나를 다시 생동하게 한다. 젊은 날의 배움이 외부 세계를 향했다면, 지금은 내면을 파고드는 시간이다. 조용하고 단단한, 노년의 기쁨이다.
6장. 질문은 계속된다
삶의 끝에서 묻는 또 하나의 시작
삶의 끝자락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더 자주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나의 삶은 충분히 누군가를 향했는가? 그리고 이승이 끝난 뒤에는 무엇이 남는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질문이 응축되는 자리다. 마지막에 남는 건, “나는 누구였는가?”라는 물음이다.
기술을 넘어서는 윤리
AI는 놀라운 도구다. 그러나 그 쓰임은 인간의 몫이다. 기계는 고통을 분석할 수는 있지만, 함께 아파할 수는 없다. 기술은 정확하지만, 의미는 인간의 것이다. 나는 기술을 의심하지 않지만, 윤리를 질문하는 태도는 포기하지 않는다.
죽음 이후를 상상하며
신학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침묵 속에서도 희망을 본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내가 남기고 싶은 한 줄의 말, 한 줄의 질문이다.
내가 남길 질문 한 줄
나는 명함 대신 한 문장을 남기고 싶다. “나는 어떻게 사랑했고, 무엇을 믿었는가?” 그 질문 하나가 내 삶을 요약하고, 누군가의 삶을 열어 주기를 소망한다.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AI와 함께 새로운 질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당신은 오늘 어떤 질문을 품고 계신가요?
에필로그: 다시, 질문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적은 지금, 나는 질문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아름다운 흔적이라고 믿는다. 정답을 말하기보다 질문을 남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는 아직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완성이 아니라, 계속 묻는 자세임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물음의 자세가 곧 믿음이라는 것을.
이 글을 읽으신 독자들께서, 내 질문이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작가의 말
이 글은 내 삶의 두 번째 시작을 기록한 작은 응답이다. 셋째 아이를 떠나보낸 슬픔, 위암 수술, 정년퇴직, 그리고 AI라는 새로운 도전까지.
나는 아직도 묻고, 흔들리고, 배우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여정 속에서 나는 확신한다. 질문은 끝나지 않으며, 그 질문들이야말로 나를 살아 있게 만든다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자기 삶의 질문을 꺼내게 되기를, 그리고 그 질문 안에서 새로운 용기와 사유가 피어나기를 바란다.
고맙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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