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6월의 어느 토요일이었습니다. 국립창원대에 몸담은 지 3년쯤 되었던 그때, 벌써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날의 기억은 마치 어제처럼 선명하게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12.12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대학가는 늘 긴장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반정부 시위, 들끓는 청춘의 외침 속에서 캠퍼스엔 평온한 하루가 드물었지요.
저는 가톨릭학생회의 지도교수로서 학생처의 당부를 자주 받았고, 가끔은 형사들이 연구실을 드나들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신자 교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켜야 할 것도, 조심해야 할 것도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음 한구석엔 쌓이는 피로와 서운함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처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안동교구의 한 주교님이 대학생들과 함께하는 행사를 연다며, 창원대 학생이 참석할 수 있는지도 확인하고, 현장 분위기를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 기분 좋은 부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또 한 번 ‘가톨릭 신자 교수’라는 이유로 나는 조용히 안동으로 향했습니다.
행사 장소는 안동군의 한 조용한 농촌 마을, 과수원 속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고, 안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야 닿을 수 있었던, 멀고도 낯선 길이었지요. 현장에 도착해보니 창원대 학생은 보이지 않았고, 인근 대학생들과 신자 30여 명이 두봉 주교님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교수는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처음엔 조금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교님과 그 자리의 따스한 공기에 이끌려 저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어울려 웃고, 게임을 하며 서로를 알아가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느꼈던 두봉 주교님의 인품은 지금도 제 마음 깊이 남아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이에게도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다가오시던 분, 그 맑은 웃음과 따뜻한 말씨 속에서 저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엠티는 1박 2일 일정이었지만, 저는 서울 일정이 있어 첫날 밤이 되기 전,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와 안동 버스터미널로 향했습니다.
그 시절엔 과수원 근처에 공중전화조차 없어 즉시 학교에 보고도 할 수 없었고, 서울에서 일정을 마친 뒤 출근해 뒤늦게 보고를 드렸더니, “왜 즉시 결과를 보고하지 않았느냐”며 질책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씁쓸히 떠오릅니다.
그 후, 저는 주교님께서 저술하신 여러 책을 읽으며 그분의 신앙과 철학, 삶의 태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난 두봉 주교님은, 책 속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순수하고, 더 소탈한 분이셨습니다. 학생처가 염려했던 반정부적 발언이나 비판적 언급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고, 삶을 따뜻하게 끌어안으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날 엠티 자리에서 느꼈던 제 안의 선입견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진심으로 마주한 한 인격체에 대한 경외심은 아직도 제 마음속에 고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월이 흘러 다시금 주교님을 떠올리며 저는 조용히 고개를 숙입니다. 2025년 4월 11일, 의성 봉양면, 조용한 한옥 사택에서 주교님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주교님의 삶이 머문 그 공간은 말없이도 많은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20년 넘게 입으시던 낡은 속옷, 테이프로 고정해가며 끝까지 사용하던 스마트폰, 헤지고 낡은 성경과 사전들… 그 무엇 하나 쉽게 버리지 않으셨던 그분은 귀한 물건일수록 이웃에게 먼저 나누셨습니다.
“낡은 것은 내 손에, 새 것은 이웃에게.”
이 짧은 문장이, 주교님의 삶 전체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삶이 곧 복음이었던 분. 검소함 속에서도 풍성한 사랑을 나누시던 분. 항상 웃으며 사람들을 맞이하시던, 우리의 따뜻한 형, 친구, 스승이셨던 주교님.
이제 그분의 등을 조용히 바라보며 저는 마음 깊이 인사드립니다. 두봉 주교님, 우리들의 모범이 되어주셔서,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변함없는 사랑과 미소로 함께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