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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늙는다는 것

거의 모든 ‘어떻게’도 견뎌낼 수 있는 사람

by 이천우

사람답게 늙는다는 것

1. 삶의 속도가 달라지는 순간


나이 듦은 단순히 해마다 숫자를 더해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결이 바뀌는 일이며, 세상과 맺는 관계의 방식이 서서히 달라지는 시간이다. 젊은 시절엔 앞만 보고 달렸다. 빠를수록 잘 사는 줄 알았고, 바쁠수록 삶의 의미가 증명되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세상이 너무 빨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기술은 숨 가쁘게 진화하고, 세상은 젊은 감각으로 재편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문득 혼잣말처럼 묻게 된다.
“나는 아직 이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일까?”

2. “예전 같지 않다”는 말속의 진실


이 질문은 단지 외부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작게 울리는 자아의 회의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우리 몸의 작은 변화를 통해 현실이 된다. 어느 날 문득, 전에 없던 실수가 늘어나고, 기억이 흐릿해지며, 예전에는 너무도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70대에 접어들면, 많은 이들이 조심스레 말한다. “예전 같지 않다”라고. 몸의 반응이 느려지고, 기억은 가끔씩 희미해진다. 그런데 그런 말은 단지 신체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자리를 점검하게 만드는 어떤 내면의 울림이 거기엔 담겨 있다.

3. 조용한 변화, 내면의 울림


오랫동안 운전대를 놓지 않던 지인 한 분이 어느 날 나직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운전대를 잡고 나면 알겠더라. 길은 여전한데, 내 눈은 흐릿하고 반응은 느려. 예전엔 손끝으로도 감 잡던 순간들이, 이젠 생각을 몇 번은 거쳐야 몸이 움직여. 나도 이제, 조용히 물러나야 할 때가 온 건가 싶은 마음이 들어.”

그의 말은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표지판을 놓치는 순간보다 더 뼈아픈 건, 세상이 그대로인 데 반해 나만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자각이었을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해도 괜찮을까’라는 조심스러움으로 바뀌고, 익숙하던 일상 속에서도 작은 경계선들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것은 쇠퇴가 아니라 전환이며, 물러남이 아니라 성숙으로 향하는 또 하나의 문턱이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나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다. 인지력이 조금씩 느려진다고 해서 존재의 무게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천천히, 더 깊이,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4. 늙는다는 것은 전환이다


젊을 때는 스쳐 지나쳤던 바람의 결, 나뭇잎의 떨림, 누군가의 침묵 속에 담긴 마음—그 모든 것이 이제는 가슴 깊이 와닿는다. 말은 줄었지만, 한 마디의 무게는 더 커졌고, 걸음은 느려졌지만 그 안에는 삶을 곱씹는 여백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답게 늙는다는 것은 단지 병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나답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간직하는 일이다. 바깥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나만의 속도로, 진실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다.


5. 니체와 프랭클, 노년을 다시 바라보다

100미터 달리기를 떠올려본다. 결승선을 통과했다고 해서 인간이 곧장 멈추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여운 속에서 끝까지 달리고, 어떤 이는 마지막까지 자세를 가다듬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속도는 줄고, 무대는 작아졌지만,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달려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노년의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이 시기는 ‘자기 극복’의 마지막 장이며, 삶의 의미를 끝까지 붙드는 투혼의 시간이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그 어떤 이유로 살아야 하는 사람은 거의 모든 ‘어떻게’도 견뎌낼 수 있다.”


이 문장은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동기는 쾌락도 권력도 아닌,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

6. 끝까지 달리는 자의 아름다움

늙는다는 것은 의미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다. 손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이웃과 함께 걷는 짧은 산책, 그 속에 담긴 미소 한 줄이 누군가의 하루를 밝혀줄 수 있다.

속도는 줄었고, 무대는 작아졌을지라도, 마지막까지 나다운 모습으로 투혼을 불태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아름다움 아닐까. 삶의 마지막에서조차 의지를 놓지 않고, 자기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존재—그것이 바로 사람답게 늙는다는 것의 참된 얼굴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끝까지 나다운 모습으로 투혼을 불태울 수 있다면”

“그 어떤 이유로 살아야 하는 사람은 거의 모든 ‘어떻게’도 견뎌낼 수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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