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불쑥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햇살에 반짝이던 냇가, 소꼴을 하며 땀을 식히던 산모퉁이의 그늘, 보리밭을 가르던 바람, 그리고 뒷동산에서 들려오던 참새 소리. 그 모든 기억이 하나의 풍경이 되어 마음속에 펼쳐지면, 언제나 중심엔 푸르른 잔디 위의 여름이 있습니다.
그 잔디밭은 단순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과 뒹굴며 정들게 했던 웃음,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자장가의 선율,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지던 놀이라는 이름의 자유. 그것은 아마도, 내 삶의 첫 풍경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누구나 먼저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뛰놀던 골목, 정겨운 이웃들, 그리고 오래된 가게. 세월이 흘러도 그 모습이 남아 있다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묻게 됩니다. “옛 모습 그대로, 잘 있었느냐”라고. 그곳엔 단순한 건물이나 골목이 아니라, 부모와 형제, 어린 나를 웃게 했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며 우리는 많은 것을 잃고 또 얻습니다.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분주함 속에서도, 마음 깊은 곳에 떠오르는 건 언제나 고향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뒷동산 잔디밭의 감촉, 저녁 무렵 어머니가 부르시던 목소리. 그것들이야말로 지금껏 살아낼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은 단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뿌리로 느껴집니다. 한때는 벗어나고 싶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다시는 만질 수 없는 장면들로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부모님이 계시던 마루는 없어졌고, 함께 뛰놀던 골목은 낯선 풍경으로 바뀌었지만, 그 빈자리엔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가 자라나 있습니다. 떠날 땐 미처 몰랐던 것들을, 돌아볼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고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시작점이자, 마음을 원점으로 데려다주는 조용한 품입니다. 더 나은 자리, 더 화려한 집을 향해 달리던 마음도, 고향의 푸른 잔디를 떠올리는 순간 다시 단순해집니다.
행복은 사실 아주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고향을 찾습니다. 부모님과 형제가, 어린 시절의 친구가, 그리고 그 잔디 위의 여름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면서. 고향은 말없이 기다립니다.
“언제든 괜찮다. 너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라고.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해도, 그 잔디 위의 여름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푸릅니다. 잊힌 줄 알았던 그 장면이, 어느 노을 진 오후에 문득 피어나 조용히 속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