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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아름다움, 독일식 미감이었다.

근대디자인사 #5. 유겐트스틸

by 공일공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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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겐트스틸, 감각을 ‘체계’로 묶다

아르누보가 자유로운 곡선으로 감각을 펼쳤다면, 유겐트스틸은 그 감각을 질서로 묶는다.

장식을 줄인다. 구조를 드러낸다. 재료의 느낌을 숨기지 않는다. 포스터는 보이는 그리드로 정리하고, 활자는 일정한 리듬으로 배열한다. 가구는 접합부까지 단정하게 맞춘다. 한 규칙이 여러 매체를 묶어 ‘한 목소리’로 보이게 한다.

이 문법은 베렌스의 AEG 통합 디자인으로 이어지고, 나중에는 기능주의·CI/BI·정보디자인의 기준이 된다. 핵심만 남기고 오래 가는 언어로 다듬는 일. 그것이 유겐트스틸이다.




왜 ‘유겐트(=청년)의 스타일’이었나


1896년 뮌헨에서 일러스트 잡지 〈디에 유겐트(Die Jugend)〉가 창간된다. 여기서 ‘유겐트스틸’이라는 이름이 굳어진다. 청년 예술가들은 프랑스풍 아르누보의 감상적 곡선을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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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과잉을 덜어내고, 구조를 보이자”고 말했다. 질서(Ordnung), 평면(Fläche), 절제(Mäßigung)가 키워드였다. 자연 모티프는 남기되, 형태는 단순화하고 구성은 기하적으로 정리했다. 감각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감각을 견고한 체계에 담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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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픽과 타이포: 선을 줄이고 체계를 만든다


유겐트스틸 그래픽은 평면화와 실루엣을 선호한다. 명암 묘사보다 면 분할을 택하고, 배경–도형–문자의 관계가 명확하다. 덩굴·백합·백조 같은 자연 소재는 반복과 리듬으로 ‘패턴’화되며, 제목·장식선·프레임이 하나의 조형으로 엮인다.


오토 에크만의 Eckmann-Schrift는 곡선의 생기를 살리면서도 획의 두께와 리듬을 규칙화한다. 장식을 무늬가 아닌 문자 체계로 치환한 사례다. 포스터·표지·브로슈어에서 그리드 의식이 태동한 것도 이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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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 인사이트] 포스터는 ‘그림 위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 자체가 그림이 되는 레이아웃으로 설계한다. 장식은 무늬가 아니라 간격·여백·반복 규칙으로 다룬다. 로고·타이틀·캡션의 획 대비·리듬을 통일하면 시각 언어가 자동으로 생긴다.




2) 공간과 사물: 재료의 진실을 드러내다


건축·가구에서도 과잉을 덜어낸다. 재료의 진실(Materialehrlichkeit)을 중시해 목재는 결을, 금속은 접합부와 리벳을 감춘 대신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장식은 붙이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서 나온다.


다름슈타트 예술가 마을(Mathildenhöhe, 1901–)은 주거·가구·조명·섬유를 하나의 조형 규칙으로 묶은 전체 디자인 실험의 장이었다. 헨리 반 데 벨데와 페터 베렌스는 실내·가구·그래픽을 한 손에서 설계하며 ‘한 브랜드 한 규칙’의 선례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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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 인사이트] 제품-패키지-웹-매장까지 동일한 재료감과 결을 유지하면 브랜드 경험이 단단해진다. 디테일(모서리 R, 금속 이음, 나사 헤드)은 숨기지 말고 의도된 표정으로 노출한다. 가구·조명·사이니지의 두께·모듈·반복 간격을 통일하면 공간이 곧 시스템이 된다.




3) 산업으로 스며드는 미감: 베렌스와 ‘초기 CI’


1907년 페터 베렌스는 전기회사 AEG의 자문 디자이너가 되어 로고·서체·카탈로그·포장·가전제품·공장 건물까지 전면 통합 디자인을 시도한다. 유겐트스틸의 절제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기획이다. 장식 최소화, 구조 노출, 형태의 일관성이 브랜드 언어가 된다. 이는 훗날 바우하우스와 국제양식, 현대 CI/BI 시스템의 직접 조상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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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 인사이트] 문서 템플릿·포장·UI 컴포넌트·촬영 톤을 한 규칙표로 관리한다. 제품 실루엣의 기본 도형(원·사각·타원)을 정의하고 파생 모델은 그 도형을 ‘변주’한다. 광고·포스터의 여백률·행간·자간을 수치로 고정하면 조직이 바뀌어도 브랜드가 흔들리지 않는다.




아르누보와의 차이: ‘곡선의 언어’에서 ‘체계의 언어’로


아르누보는 선 자체가 메시지다. 생장하는 곡선, 감각의 확장, 시각의 유희가 전면에 있다. 유겐트스틸은 선을 규칙을 드러내는 도구로 쓴다. 선의 감정을 낮추고 구조의 질서를 끌어올린다. 결과는 담백하고 오래 간다. 그래서 아르누보가 강렬하게 피고 짧게 졌다면, 유겐트스틸은 기능주의·브랜딩·정보디자인의 언어로 스며들어 오래 남았다.




‘절제’는 미니멀리즘이 아니다


유겐트스틸의 절제는 비우기가 목적이 아니다. 핵심 리듬만 남기는 선택이다.


① 구성: 페이지·포스터의 그리드 1개를 정하고 끝까지 지킨다.
② 타입: 헤드–서브–본문의 획 대비·곡률을 통일한다.
③ 색: 메인 1색 + 재료색(목·금속·종이색) 1색으로 묶는다.
④ 장식: 패턴은 선택이 아니라 규칙으로 만든다(반복 주기·스케일·여백 고정).
⑤ 재료: 버튼 두께, 섀도 깊이, 모서리 R을 ‘제품 두께’처럼 수치로 관리한다.


유겐트스틸은 ‘덜 예쁜 아르누보’가 아니다. 감각을 체계로 번역한 첫 대규모 실험이다. 그 실험은 브랜드 시스템, 기능주의, 정보 디자인의 문법으로 이어졌다. 오늘 우리가 스타일 가이드를 만들고, 그리드를 고정하고, 로고와 제품 실루엣을 한 규칙으로 묶을 때 우리는 유겐트스틸의 어깨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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