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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켓 Aug 22. 2017

브런치 무비 패스 : 더 테이블 (The Table)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지친 일상의 쉼터, 또 누군가에게는 진지한 대화를 위한 무거운 자리 그리고 다른 어떤 이에게는 작업을 위한 공간.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앉았다 가는 어느 한적한 동네 카페의 테이블을 이 영화에서는 '마음이 지나가는 곳'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타이트하게 들어오는 클로즈업은 배우들의 눈과, 코와, 입의 자그마한 움직임까지 화면에 담아내며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침에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풀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려 준비하는 시간 오전 11시.
옛 연인이었던 유진(정유미)과 창석(정준원)은 그동안 서로에게 궁금했던 것들의 방향이 너무나도 다르다. 자신의 입으로 많이 변했다고 말하는 유진과는 반대로 창석은 아직도 엉뚱하기만 하다. 대화를 나누는 건 단 둘 뿐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타인들이 언급되고, 심지어 대화의 흐름을 끊기도 한다. 결국 둘은 각자의 마음을 꺼내어 볼 기회조차도 가지지 못하고 투닥거리다 이야기를 마친다.


점심에 먹은 식사로 부른 배를 두드리며 따스한 햇살 아래 온몸이 노곤 해지는 오후 2시 반.
상대의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경진(정은채)과 오늘은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민호(전성우).
하룻밤 사랑 후 훌쩍 떠나버린 그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실없는 이야기만 꺼내는 그가 야속해서 인지 경진의 대답은 퉁명스럽다.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답답한 마음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낸다. "좋은 거 보면 사진 한 장이라도 보낼 줄 알았어요." 그러자 민호는 대답한다. "그래도 되나 싶어서..."
그러면서도 여행지에서 생각이 나서 샀다며 자신에게 줄 선물을 하나 둘 꺼내는 민호를 보며 그녀는 웃음이 터지고 만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둘은 함께 카페를 나선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설레기도 하며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긴장되기도 하는 오후 5시.
다정한 모녀처럼 보이지만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두 여인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다. 사기 결혼을 위해 가짜 엄마를 섭외한 은희(한예리)와 그녀가 선택한 엄마 숙자(김혜옥).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사항을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해 둘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 눈빛 때문이었을까, 은희는 숙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더 터 놓게 되고, 은희의 별명을 부르며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연습하는 숙자의 얼굴에서도 진심으로 딸을 생각하는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꺼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서로를 알게 된 은희와 숙자는 그렇게 대화를 끝낸다.


마지막으로, 내려앉은 어둠 속에 숨겨지지는 않을까 자꾸만 솔직해지고 싶은 저녁 9시.
초조한 지 앞에 놓인 꽃의 잎을 몽땅 떼어 놓은 운철(연우진)과 그런 그를 꾸짖는 조신할 수 없는 여자 혜경(임수정).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약속한 그녀지만 아직도 운철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운철이 헤어지라면 헤어지겠다며 거침없는 발언을 내뱉는 그녀지만 사실 그를 만나기 전 마시고 온 술과 카페 밖에서 태우던 담배가 혜경의 떨리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온 마음을 비춰 자신의 마음을 전했지만 단호하게 현실을 생각하는 운철을 보며 이제 연락하지 않을 거라고 인사하는 혜경.
때로는 진심으로 원해도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마음 가는 길과 사람 가는 길이 왜 다른 건지 모르겠다는 그녀의 말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지만 함께할 수 없는 둘은 그렇게 헤어진다.

이렇듯 언뜻 생각하면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네 번으로 나누어 진행되는 에피소드의 분위기는 카페의 테이블이라는 공간과 그들이 만난 시간대 설정 덕분에 더욱 잘 살아난 것 같다.

그리고 에피소드가 나오는 순서를 보는 내 생각은 이렇다.
1. (한때 너무 사랑했지만 이제는)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는 두 사람
2. 진심을 확인했지만 아직 알아가야 할 것이 많은 두 사람
3. 상대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고 이해하게 된 두 사람
4. 서로를 잘 알지만 가야 할 길이 다른 두 사람
결국 이 영화는 하나의 인연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네 가지의 이야기로 나누어 관찰하듯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한다.

또 한 가지 느낀 점은 사실 캐릭터 간의 설정이 별날 뿐이지 그들 사이에 오간 대화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특별하지 않은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화면을 꽉 채운 배우들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시선 처리와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또 마무리되는지 연결 지으면서 관람한다면 마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대화를 하는 것처럼 혹은 카페 어딘가에 앉아 그들의 사연에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아마 이 영화에 서서히 빠져들게 될 것이다.

계절이 지나면 떨어지는 꽃잎들과 같이 테이블 위에서 우리도 그런 존재일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있었던 곳에는 항상 이야기가 남고 추억이 남는다.
공간이 가진 분위기라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들의 집합체 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앉았던 동네 카페의 테이블 위에도 지나간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그 공간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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