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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켓 Mar 07. 2017

해빙 (解氷, Bluebeard, 2017)

: 관객마저 함정에 빠뜨린 영화

*스포일러 있음




영화는 승훈(조진웅 분)이 화정이라는 신도시로 향하는 모습으로 문을 여는데, 황량하고 공허한 개발지들이 펼쳐진 배경들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미스터리 한 사건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느 날, 세 들어 살던 건물의 주인인 정육식당 정 노인의 내시경을 해 주던 승훈은 그가 가수면 상태에서 말하는 살인 고백을 듣게 되고, 여기서부터 영화는 긴장감을 조성하며 빠르게 사건을 진행시킨다. '한강 위 얼음이 녹으면 감춰졌던 비밀이 떠오른다'는 문구는 수면 내시경 중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이수연 감독의 영화 제작 동기이며, 그 안에는 마치 깊은 수면(水面)과 같은 인간의 무의식에 담긴 본성 혹은 감추고 싶은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묘한 분위기의 정육식당 부자, 승훈은 그런 부자를 의심하며 주위에서 관찰한다. 건물주와 세입자라는 관계로 엮여있는 승훈은 자신을 향한 성근(김대명 분)의 관심과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만, 그럴만한 마땅한 이유도, 변명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이미 승훈이 함정에 빠져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정육식당이라는 공간은 피를 연상케 하는 빨간 조명과 고기를 자르기 위해 칼을 다루는 모습 그리고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창고라는 공간들로 이루어져 어쩌면 정육식당 부자에게 '살인'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정육식당 부자에 대한 의심으로 하루하루 신경이 예민해지던 승훈의 주변에 수상쩍은 인물이 또 등장한다.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미연(이청아)과 자신을 은퇴한 형사라고 소개하던 조경환(송영창)이 그 주인공이다.

먼저 조경환은 영화가 시작되던 장면인 버스 안에서부터 승훈을 지켜보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승훈이 정육식당 부자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품은 후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카메라는 그런 조경환의 모습을 실물이 아닌 거울 속의 모습으로 담아낸다. 처음에는 거울에 묶인 빨간 노끈을 기점으로 조경환의 얼굴과 목이 있어 죽은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뒤이어 실물을 잡는 장면을 보고 그건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누구일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알겠지만, 그는 승훈과 같은 학교에 다녔던 선배임과 동시에 심리 치료를 해주던 상담사인 남인수였다. 그런데 어째서 승훈에게 그런 모습으로 보였던 걸까?

상담사라는 직업은 보통 치료자의 내면을 파고들어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리고 치료자는 그런 상담사에게 의지하게 된다. 승훈은 인수에게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그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무의식 중에 자신이 배정자(정아미 분)를 살해한 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 그렇기 때문에 전직 형사라는 직업이 투영되어 자신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도와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자신을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 줄 것 같았던 조경환이 남인수로 보이게 되던 순간, 아마 승훈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또다시 함정에 빠졌다는 공포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미연은 이와 반대로 승훈이 자신의 약물 복용 사실을 부정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시선으로 바라본 인물인 것 같다. 자신이 프로포폴을 주사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미연이 약물을 팔아 돈을 번다는 것만 의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은 감독은 왜 미연이 승훈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한 모습으로 비춘 것일까 하는 것인데, 어쩌면 승훈이 프로포폴을 빼돌린다는 사실을 알고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껴 잘해준 것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점점 사건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승훈이 과거에 살인을 저지른 데다가 정신병이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었으며, 그가 기억하고 있던 것들은 모두 왜곡된 것이었다'라고 말이다. 구구절절 영화의 반전에 대해 늘어놓는 탓에 다소 지루한 감이 생기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반전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또 사실은 정육식당 부자는 살인 사건을 감추고 있었고, 우리가 살해당했을 거로 생각했던 첫째 부인은 살아있었으며, 미연은 약물을 빼돌리고 있었다.'라는 두 번째 엔딩을 보여준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차라리 첫 번째 반전에서 끝이 났으면 좋았을 것을, 굳이 하나를 더 보태 오히려 영화가 엉성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이수연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친절한 영화'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가끔은 지나친 친절이 해가 되기도 한다. 늘어지는 엔딩 이외에도 현실과 악몽을 교차하는 장면이 여러 번 반복되는 부분과 15세 등급에는 맞지 않는 과한 장면들로 이미 관객들은 피로감이 몰려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강의 얼음이 본격적으로 녹기 시작하면 떠오르는 시체들'이라는 요소가 그저 모티브로 그친 것이 상당히 아쉽지만, 그래도 '가수면 상태에서의 살인 고백을 듣는다면 어떨까'라는 주제로서의 스토리는 매우 신선하고 좋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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