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세이 - 죽도록 미워했던 나의 아빠에게
년도는 잘 모르겠지만 1월 2일은 우리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다.
우리는 때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 중에 하나가 바로 1월 2일이다.
-도대체 왜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했어? 아니 결혼식날 도망이라도 가지 그랬어.
라는 농담처럼 내뱉던 나의 말들을 우리 엄마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엄마를 위로한답시고 했던 말들이 오히려 상처가 되어 아직도 꽂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난 참으로 못난 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아빠와 결혼을 한 것은 엄마의 선택인데 그것을 두고 내가 무어라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인지. 이 같이 말을 내가 중학생 때부터 했으니 난 거의 20년 넘게 주제넘는 짓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안할까 봐 아무 말 없이 들어주기만 했던 나의 엄마. 그런 엄마가 혼자된 지 벌써 십 년이 되었다.
2012년도 가을부터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아빠에게 우리 가족은 버는 수입의 상당 부분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아빠는 백 원을 벌면 본인에게 오십 원을 쓰고, 그 오십 원 중 이십 원은 술을 사 먹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어쩌면 딸 넷은 짐짝처럼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처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가난 속에서 악착같이 삶을 버텼고, 이제야 숨을 쉬는구나 싶을 때쯤 아빠가 아프기 시작했으니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에게도 아빠가 천덕꾸러기처럼 느껴진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흔한 보험이나 노후대비조차 하지 않고 매일같이 오늘만 살아가던 아빠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는 그저 묵묵히 치료비를 대는 것뿐. 특히 나는 아빠보다는 엄마를 위하는 마음으로 아빠에게 돈을 보냈다. 안 그러면 엄마가 아빠의 손과 발이 되어 1월 2일 결혼한 그 순간부터 시작한 고생을 환갑이 넘어서도 해야 했으니까.
반년을 채 넘기기도 전에 위험한 순간들은 계속해서 찾아왔고 어느 순간 겨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첫 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는 예비 엄마였다. 우리 가족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별의 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너 아기 낳는 날 가지나 않았으면 좋겠구먼. 아무래도 아빠 기일이랑 애기랑 생일이 같은 건 좀 그러니까.
라는 말을 했다. 그래, 맞다. 나는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고 탄생과 죽음의 날이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걱정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아이 맞을 준비로 분주하며 동시에 아빠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왜 그랬을까. 평소 임산부라 중환자실에 가는 것을 극도로 걱정하셨던 엄마의 만류에도 나는 막무가내로 집을 나섰다. 왠지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장 눈물이 되었다.
-**병원으로 가주세요.
집에서 병원까지의 거리가 약 20분이었으니 그 시간 내내 울고 있는 나에게 택시 기사님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도착해서 돈을 지불하고 내리려는 그 순간 '실컷 울었으니 들어가서는 울지 마세요.'라는 말만 건넸을 뿐. 병원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하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그 순간에 추억이랄 것도 없는 몇 가지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에는 아빠가 내게 해주지 못했던 것들, 다정하지 않은 말투 들만 생각이 났는데 왜 그 순간에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것인지. 중환자실로 걸어가는 그때 나에게 아빠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함께 손을 잡고 운동회에 간 일, 내가 먹고 싶다고 떼를 쓰자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치킨 반 마리를 시켜 먹여주던 일, 반지하에 살던 당시 동네 꼬마들이 자꾸만 우리 집 문을 두드리고 장난을 칠 때 내가 울어버리자 온 동네를 뒤져 그 아이들을 찾아 혼내주던 일, 대학에 입학하자 처음으로 자랑스럽다고 말해주던 일, 첫 월급으로 사드린 내의를 아끼고 아끼다 몇 년 후 겨우 꺼내 입으신 일, 그리고 결혼식장에 내 손을 잡고 들어가며 잘 살아라 속삭여 주신 일. 그렇게 나는 아빠와의 지난 세월을 되뇌며 중환자실로 들어섰다.
-아빠, 나 왔어. 많이 아파? 나 이제 곧 아기 태어날 텐데. 애기 보고 갈 거지? 아직 안 갈 거지?
울지 말자. 울지 말자. 나는 아빠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참았지만 결국 그 말에 눈물을 흘린 것은 아빠였다.
사실 당장 오늘이라도 돌아가신다고 한들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아빠는 죽음에 매우 가깝게 접근해 있었다. 혼자 얼마나 무서울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내 아이를 보고 가라니.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대체 얼마나 내가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 주에 다시 찾아가서
꼭 아빠에게 오늘의 말실수를 사과해야지. 하지만 나는 그다음 주에 아빠를 보러 가기도 전, 출산을 하였고
아빠는 그로부터 열흘 정도를 더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 도대체 왜.
매년 1월 2일이 되면 2013년도 1월이 생각난다. 아빠는 본인의 결혼기념일을 중환자실에 누워 두려움과 싸워야만 했다. 잘 견뎌내고 있어 고마워, 아빠.라는 말을 해줄걸.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미워해서 미안했다고 말해줄걸... 때문인지 나는 새해가 되면 아빠의 납골당에 들러 매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사랑하고 고마웠다고. 그리고 이 마음은 여전히 변치 않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