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
가장 선호하는 계절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여름이다. 사람들은 덥다고 하는 그 기운들이 내게는 따스함이었다.
스물 두 살쯤 첫 연애를 했다. 당시 나보다 두 살이 어렸던 그 친구는 내게
“너는 왜 겨울에 태어났는데 겨울을 제일 싫어해? 물론 겨울에 태어났다고 다 겨울을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추위를 좀 덜 타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인생의 첫 연애가 그렇게도 좋았나보다. 별 것 아닌 그 말에도 꺄르르 웃으며, 그럼 나는 여름에 태어나 더위를 잘 안 타는 남자와 결혼 해야겠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친구는 봄에 태어났기에 엄마가 자기를 조금만 더 늦게 낳았으면 좋았겠다며 함께 웃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둘 다 무지해서가 아니라 풋풋해서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처음이 주는 설렘이 있다. 마흔이 넘은 지금 그때 그 추억이 생각나는 건 아쉽고 그리워서가 아니라, 단지 말도 안 되는 농담에도 함께 웃음을 수 있는 서툰 연애였고 그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소꿉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매일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여름이 되면 이따금씩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후로 나는 몇 번의 연애를 더 했고 스물아홉, 정말로 여름에 태어난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땐 그게 운명인 줄 알았지
스파게티 소스통을 들고 경비실을 찾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게 가장 힘든 일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기에. 나름 주5일은 러닝을 뛸 만큼 운동을 좋아하고 언제 어디서 누구와 붙어도 팔씨름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나인데 이 소스통 만큼은 이기지를 못하겠다. 끊임없는 밀당 끝에도 하염없이 시간만 흐를 뿐 내가 승리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운동을 하는 첫째 아이가 학원에서 곧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니 내 마음은 더 급해져만 갔다. 웬만한 일에는 긴장을 하거나 식은땀이 나지 않는 편인데 매일 훈련을 가는 그 사이에 잠시 간식을 먹어야 힘든 훈련을 버틸 수가 있는 내 새끼가 곧 온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크림 스파게티를 해주려고 벌인 일이 나를 이렇게 난감하게 할 줄이야. 물론 순전히 엄마인 나의 생각일 뿐이지만, 지금 먹지 않으면 학교에서 먹는 급식 이후에 밤 8시 30분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녹초가 되어 돌아올 것을 생각하니 그거만큼 안쓰러운 게 없다. 나는 모성애를 하늘 끝까지 끌어올려 있는 힘껏 소스통에 다시 한 번 손을 대본다. 하지만 결과는 빨개진 얼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방귀, 부러질듯하나 손가락. 이러다가는 내가 손가락을 부여잡고 정형외과를 가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부터 들자 더욱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재료 손질은 다 해뒀고 스파게티 면도 거의 다 익어가고 있었다. 나는 빨리 꺼내달라는 스파게티 면을 외면한 채 가스의 불을 끄고, 밸브를 잠그고, 소스통을 들고, 냅다 뛰었다. 다행히 한가로운 낮 시간이었기에 엘리베이터는 금방 와주었고 나는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경비실로 달려가 “사장님, 죄송한데 제가 급해서요. 이게 안 열려요. 집에 저 혼자 있어서요. 이것 좀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라며 인사성도 없는 무식한 어른처럼 본론부터 말하며 소스통을 들이밀었다. 경비 아저씨는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내게서 건네받은 그 통은 ‘뽁’소리를 내며 힘없이 열렸다. 아니 저렇게 쉽게 열리는 놈이 왜 내게는 그렇게 깐깐하게 군건지. 너무 쉽게 열려서 솔직히 민망할 정도였기에 내 얼굴은 다시 한 번 붉게 물들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내 등 뒤로 아저씨는 언제든 또 어려우면 찾아오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내 사정을 다 아시는 것처럼. 그런데 이상했다. 급하게 뛰어가던 아까와는 달리 내 발은 왜 이렇게도 무거운지. 집으로 향하는 내내 볕은 왜 그리도 뜨거운 지.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아, 혼자라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사실 혼자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힘들거나 외롭거나 어려운 건 없었다. 아이가 셋이라서 외로울 틈이 없었고 또 셋이라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니 나도 딱히 힘든 부분이 없었다. 물론 일을 하며 온전히 혼자 힘으로 꾸려나가야 한다는 것이 심적 부담이었지만 아이들이 주는 행복은 하루의 피로를 싹 잊게 해주었기에 내 선택에 대해 후회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편함과 허전함이 느껴지다니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여름마저 답답했다. 게다가 장애물처럼 느껴지는 한낮의 볕을 피하기 위해 그늘을 만들어 이마에 갖다 댄 나는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손등부터 팔까지 송글송글 맺히고 미간까지 찌푸리고 있는 내가 보인다. 왜 이토록 모든 것이 싫어진 걸까. 그 순간 한 손에 소스통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 발 끝에 시선을 두고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여름에게 인상을 쓰며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사실 여름은 잘못이 없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