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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Mar 19. 2024

불편함

학교 강의 중 교수님이 던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

이번주에 있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지난번에 놓친 강의의 녹화본을 봤다. 이번 학기에는 유독 놓친 강의를 녹화본을 통해 보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이 과목은 이번 학기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기도 하고, Chebyshev Inequality 부분에서 렉쳐를 놓친 것 때문에 이해하는데 좀 애를 먹는 것 같아서 계속해서 렉쳐노트를 보는 것보다 강의 한 번 제대로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원래는 과목이 기초 회로이론이지만, 이번 학기를 통해 커리큘럼이 전체적으로 개정돼서 랩을 제외하면 대부분 선형대수학의 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행히 이번 학기에 듣는 선형대수학 수업과 접점이 많아 엄청나게 많은 노력을 쏟지 않아도 공부가 수월하고, 무엇보다 교수님이 강의를 정말 재밌게 진행해서 과거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새 과정도 상당히 만족스럽다. 교수님 자체가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수업적인 부분에서도 우리가 배우는 수학적 개념들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응용되는지 흥미로운 주제들을 이야기해 준다. 이전에 친구가 나에게 선형대수학을 도대체 배워서 어디다가 써먹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는데, 어떤 말을 하기보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해주고 싶을 정도다.


오늘 들은 강의 영상의 막바지에서 Chebyshev Inequality를 가지고 첫 번째 미드텀 성적 분포를 분석했는데, 나도 그랬고, 누구나 평균과 표준편차까지 제시되어 있는 성적 분포를 보고 지금 이 수업에서 자신의 위치가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거다(다행히도 나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안정적으로 A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인 것 같다). 그러다 교수님이 이번에 개정된 커리큘럼으로 처음 진행하는 수업에서 자신도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인정하면서, 그동안 살면서 느낀 바로는 성적은 그저 우리가 배우는 과정(learning process)을 충실히 따라갈 때 저절로 얻어지는 결과물(byproduct)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찾아오는 배움의 기회들을 충실하게 누리라고 조언했다. 처음 그 얘기를 듣고, 그동안과는 달리 이번 학기에는 점수를 좀 관대하게 주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성적과 배움 이야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교수님이 새로운 걸 배우면서 마주하게 되는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보통 뭔가 새로운 걸 배우면서 그다지 노력하지 않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어렵고, 그래서 좀처럼 진전이 보이지 않는 일을 할 때 마주하는 불편함을 자꾸 피하게 되기 때문인데, 그 불편함을 넘어서야 진정으로 자신의 학업적 역량과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더 많은 걸 배우고 해낼 수 있다. 그래서 결과 이전에 지금 찾아오는 작은 배움의 순간들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되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근래 들어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과, 당장 전날 새벽에 한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대화한 주제들과 맞물려 내 안에 큰 울림을 가져다줬다. 분명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능력과, 그걸 위해 따라가야 하는 과정이 있는데, 그 작지만 연속적인 과정에 집중하기보다는 비교적 먼 미래의 결과를 얻어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어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양쪽 다 놓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그렇게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길 위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 속에 마음속 불안감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는데, 교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그 악순환의 굴레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칼텍을 졸업하고, MIT에서 박사를 딴 교수님이 19년 전 버클리로 올 때, 자신이 원하는 가르치는 일에 더 많은 걸 투자하기 위해 많은 금전적 손해를 감내한 이야기, 이번 학기를 통해 새 교육과정을 짜면서 스탠포드에서 진행하는 비슷한 주제의 수업에서 대학원생이 진행하는 강의를 전부 돌려보고, 텍스트북도 모든 페이지를 5번씩 정독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곳에서보다도 대학에서는 가르치는 사람만큼 노력하면 절대적인 성공을 거머쥔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 외에도 4년 전에 수학적 이론들을 파이썬에서 응용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같은 부서의 동료들에게 기초부터 하나씩 물어보면서 배웠다는 등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그의 권위는 단순히 교수라는 직함을 넘어 수 십 년의 세월 동안 찾아온 새로움 속 불편함을 마주해 온 결과였다. 그가 그 순간 수 백명의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결과처럼, 내가 실현하고 싶은 삶의 순간을 위해서는 그가 해왔던 것만큼의 나만의 과정을 거쳐가야 한다.


"자기가 이렇게 해왔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I have done it so far, so you can) 마지막 말을 던지고 여느 수업 때와 같이 학생들에게 “Go away”를 외치며 강단을 내려오는 교수, 그리고 이어지는 모든 학생들의 박수갈채 소리(지금까지 수업이 끝난 후 사람들이 박수를 친 적은 마지막 강의 말고는 아예 없었다), 그 순간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맴돌던 내가 과연 이런 것들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그로 인한 불안감이 자리하던 곳에, 어떻게든 해내야만 한다는 집념이 찾아온 것 같았다. 비록 스스로의 선택이지만, 늦게나마 그날 놓친 강의 영상에서 그의 말을 들은 게 이번 학기 가장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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