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면서 돌아보기

by 일기쓰는 복학생

지난 학기부터 듣는 수업들의 주제가 죄다 회로나 파워 시스템에 관련된 내용들로 수렴해서 그런건지 나와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학교 전체에 합쳐서 40명도 안되는 내 전공 중에 한 10명은 일상적으로 본다고 해야하나, 그중 친한 사람이 몇몇 있는 반면에 접점은 있어도 대화도 별로 안 해본 사람도 있고, 존재 자체를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타인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걸 배우고 자극을 받는게 얼마나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지 알기에 기회가 될 때 새로운 사람들과 여러 가지로 교류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내는 요즘이다.


특히 지난 학기에 들었던 Power Electronics의 인트로지만 나름 전공 과목인지라 기초 회로 이론이 prereq인 Introducton to Power System and Renewable Energy는 수업 자체가 정말 에너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들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업을 듣는 사람들 중 절반 정도가 기초 전자공학 수업을 안 들었다는 게 티가 날 정도였다. 대부분의 전공 수업이 으레 그러하듯 보통 초반부에는 이전 수업의 내용을 복습하면서 기초를 확실하게 다지는데, 기초 회로 수업을 들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임피던스와 그에 따른 상의 차이에 대한 수학적 접근에 관해 물어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비록 에너지 공학이 선택과목에 있어서 높은 자유도가 있지만, 복학한 첫 학기에 결국 이 에너지 시스템을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회로와 전기 쪽 지식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 대부분의 선택 과목을 회로 관련 수업으로 채웠다. 나 역시 회로 관련 공부를 한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밀도있게 한 두학기 배우다보니 어느 정도 직관같은 게 생겼는데, 그런 걸 가지고도 결코 쉽게 느껴지지 않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디스커션 섹션 도중에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과 짧게나마 대화할 일이 생겼는데, 나에게 전공이 에너지 공학이냐 물어 그렇다고 답하니 자기도 이 전공을 하고 싶다며 나에게 무슨 공부를 하냐고 물었다. 답이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을 하는 그녀에게 혹시나 싶어 이 수업의 필수 수강 수업인 기초 회로이론 수업들(1년짜리 과정이다)을 들었냐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했다.


어…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문득 지난 학기 Power Electronics을 처음 들었을 때 prereq을 안 들었던 나에게 OH때 상담을 하면서 드롭하고 다음 해에 듣는게 나을 거다, 초반에 따라가는 것도 힘들 거라는 경고를 한 걸 떠올렸다. 그러나 그때 나는 교수의 말을 듣지 않았고, 어떻게 끝까지 따라갔지만 돌아온 결과도 그렇고, 매주 마주하는 새로운 내용들을 따라가는 데도 벅차 결국 학기 도중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나가떨어졌는데, 이후 그때를 돌아보면서 KVL이나 KCL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에너지 관련 수업에 있어서는 버클리에서 가장 어렵다고 단언할 수 있는 그 수업을 듣겠다고 한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후회라면, 내 오만함 때문에 앞으로 20년, 아니 30, 40은 여기서 배운 것들을 가지고 살아갈 거라는게 기정 사실인 상황에서 배움의 즐거움과 보람으로 가득찬 게 아니라 매주 찾아오는 과제와 랩, 매달 나오는 파이널급 분량의 퀴즈를 쫓아가기에 급급하던 시련으로 기억하게 됐다는 거다. 좋아하는 일을 정말 하기 싫어하던 그때를 돌아보면, 한순간의 오만함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체감하곤 한다.


내 경험담을 전하면서 지금껀 드롭하고 기본적인 회로이론 수업부터 들으면서 이 분야에 대한 직관과 배우는 즐거움을 차차 쌓는 게 좋다, 당장 1학년이라 그렇게 해도 빠르면 빠르지 절대 늦지 않다고 말을 할까 했다가, 혹시 내가 경험한 것들 속에서 느낀 한계를 타인에게 무리해서 씌우려고 하는게 아닌가 싶어 곧장 그만뒀다. 내 잣대로 타인을 바라볼 수 밖에 없기에 잘 해낼 것 같다는 확신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그 사람에겐 이성적으로 보면 무모해보이는 일에 도전하려는 열정이 보였다. 내 팔자가 상팔자인 마당에 다른 사람 걱정하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순수함이 없을지라도 저 넘치는 열정을 따라가면서 나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들어 연락처를 교환해 이후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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