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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an 19. 2023

사진과 기억

여행기를 쓰려고 카메라 앨범을 뒤지다 든 생각

기억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면, 자연스럽게 뭔가를 기록하는 데에 소홀해진다. 그동안 여행지나 명소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진만 찍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달리 난 온전히 이곳에서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고 속으로 비아냥댔다. 진짜 중요한 기억은 렌즈가 아니라 두 눈과 기억에 담기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내 가치관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지막 해외여행이 어느덧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동안 갔던 여행지에서의(비교적 최근에 간 곳까지도) 기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깨달았다. 보잘것없는 내 기억력이 모든 순간의 느낌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아무런 기억 보조 수단도 갖춰놓지 않았던 내가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었는지.


최근 읽은 책 <클루지>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그 자체로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맥락을 통해 기억하고 떠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맥락을 떠올릴 만한 자극이 없다면 아무리 중요한 기억이라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인간의 기억력은 허술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내 뇌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해서 삶에서 중요한 데이터를 떠올리게 해 줄 맥락을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무시해 온 거다.


그동안 사진 찍는 걸 무시하고, 소홀히 해온 결과로, 나는 그동안 다닌 해외여행에서의 소중한 기억들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그저 막연한 갔다 왔다는 추억만 남기고 말았다. 이전에 고장 난 핸드폰의 사진 백업을 해두지 않아 전부 사라진 탓도 있지만, 애당초 평소에 사진을 찍는데 익숙하고, 기억의 맥락을 남기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더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거다.


저번 제주도 여행과 이번 휴가 때 간 수원 화성 탐방 때는 그래도 예전과 달리 기회가 날 때마다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사진 퀄리티가 그다지 높지 않더라도, 가끔 너무 쓸데없는 것까지 찍는 것 같아도, 정작 돌아온 후에 글을 쓸 때 필요한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가끔은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최대한 사진의 형태로 맥락을 남겨놓으니 예전에 비해 비교적 상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기 편해졌다. 진작에 사진을 찍고, 그걸 바탕으로 글을 씀으로써 내 기억을 머리 밖의 공간에 보관해 더 다양한 맥락을 만들어 놨어야 했는데…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가는 곳마다 여러 사진을 찍고, 그걸 가지고 글을 쓸 거다. 더 많은 사진 속에 더 많은 기억의 맥락이 담기고, 그 안에서 신선한 글 주제가 떠오른다. 결국 참신한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살면서 보고 느끼는 수많은 순간을 최대한 사진에 담아내야 한다. 매 셔터 소리마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태어난다. 삶의 순간을 사진에 담아내면서 더 많은 기억을 간직하고, 그렇게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진다.


군대 보안 문제 때문에 카메라가 잠겨있는 문제가 가장 크지만, 사실 내가 글을 올릴 때 사용하는 사진은 내가 찍은 게 아니라 구글에서 퍼 온 게 대부분이다. 내가 마주했던 순간의 기억이나 감정을 분명하게 떠올리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있어 내가 찍은 사진을 사용하는 게 효과적이고, 언젠가 저작권 관련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내가 찍은 사진을 써야 한다. 외출이나 외박을 나갈 때마다 카메라 잠금을 풀고는 하는데, 막상 사진을 남긴 적은 별로 없었다. 생각보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에, 앞으로 기회가 날 때마다 더 많은 사진을 찍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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