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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an 23. 2023

사지방 계정

"전역일까지 84일 남았습니다"

전입 첫날, 훈련소와 상무대에서 썼던 글들을 하루라도 빨리 타이핑하고 싶어 오자마자 동기에게 사지방(사이버지식정보방의 줄임말)이 어딘지 물어봐 그곳으로 향했다. 동기가 가르쳐준 대로 나라사랑카드를 회원가입에 필요한 카드 번호와, 여러 개인정보를 입력했다.


“입대일은 2021년 10월 17일, 전역일은 20”21”년 4월 17일, 그리고 생년월일은 2001년 4월 27일”


회원가입 절차를 마무리하고 나서 곧장 새 계정으로 로그인하려는데 갑자기 로그인 실패 오류가 뜨면서 계정 사용자의 전역일이 지나 계정이 만료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순간 왜 이러는가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가, 내가 전역일을 당시(2021년 12월) 기준으로 이미 8개월이나 지난 21년 4월을 전역일로 입력한 멍청한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어떻게든 조치를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회원정보를 수정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해서 근본적으로 내가 한 실수를 내 차원에서 되돌릴 수 없었다. 


부대 보안업무담당관을 찾아가면 쉽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당시 온 지 하루도 안 된 내가 한 멍청한 실수를 가지고 조치해달라고 하기가 눈치 보여 말을 못 했다. 결국 보다 못한 선임이 자기 계정을 빌려준걸, 내걸 복구하는 걸 미루고 미루다가 여태까지 쓰고 있다. 그러다 요즘 들어 로그인할 때마다 신기한 알림 메시지가 뜬다.


“전역일까지 48일 남았습니다(오늘 기준)”


전역과 동시에 계정의 사용 기한이 만료되기에(그 사실을 내 계정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됐다), 이제 내 선임은 사지방 시스템이 인정하는, 자기가 그토록 되고 싶어하던 말년이 됐다. 하루하루 줄어가는 숫자를 보면서 그의 군 생활도, 동시에 군대 안에서 선임과 후임이라는 관계로 보내는 시간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걸 여실히 느낀다. 예전에는 고작 5주 밖에 차이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서로에게 그보다 더 차이 나는 동기가 있다), 화면에 오는 숫자에 36을 더한 게 내 남은 군 생활이라고 생각하니, 마지막쯤에 와서 그 차이가 유독 크게 느껴진다(비율상 차이는 점점 커지고 있긴 하니까). 


지난주에 선임 한 명이 전역하면서, 내가 전입 온 날 신병 생활관에 있던 사람이 하나씩 떠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중대에서 내 위로 2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가 가고 나면 36일, 동기가 가면 13 남는다. 2주 전에 전역한 선임이 내가 처음 온 날 중대에 있는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다 집에 가야 내 차례라고 이야기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 15명 넘는 사람들이 전부 다 집에 갔고, 내 차례가 오기까지 정말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드디어 전역이 오는 건가 싶어 설레다가도 여전히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잔여 복무 일수를 보면 괜히 착잡해진다. 


시간이 좀 빨리 가라고 피아노랑 축구 같은 새로운 취미도 시작하고, 전역하면서 사고 싶었던 물건들도 사면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을 보면 내가 하는 일들도 어느 순간 멈춘 채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정체된 것만 같아 답답함을 느낀다. 그런 나에게 사지방 로그인할 때 뜨는 전역일 알림은, 느리지만 분명 시간이 흐르고 있고, 그토록 안 간다고 생각했던 시간마저 다 지나고 나면, 만료돼 사용할 수 없던 내 사지방 계정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전역을 하고 나면 20대의 35%를 지난다. 법이 바뀌면서 20대를 1년 더 벌게 된 건 행운이지만, 사실 그저 숫자에 불과하기에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어제 친구와 대화하기 전부터 늘 생각해왔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젊고, 에너지 넘치는 20대라는 시기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흘러가버릴까 걱정이 된다.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시간 속에서 그저 허우적대며 쓸려가고 싶진 않다. 해변가에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서퍼처럼, 자유롭게 파도를 따라다니며, 밀려오는 파도를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하며 매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 그래서 남은 군 생활 동안 수없이 많은 파도가 몰아치고,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더라도, 모든 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사람에 대한 기억은 처음이 중요하지만, 시간에 대한 기억은 결국 마지막이 중요하니까. 여러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형용사 뒤에, 마지막으로 "그래도 즐겁고 의미 있던 시간"이라는 표현으로 이곳에서의 기억을 정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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