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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an 30. 2023

시든 꽃

청소 중 시들어버린 꽃을 보며 떠올린 생각

한곳에 머물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 그곳을 더욱 유심히 관찰하게 되고, 비로소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와 평소라면 쉽게 놓쳤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군 생활 처음으로 용사 휴게실 청소를 하면서, 라면이나 냉동을 먹으러 갈 때를 제외하면 좀처럼 갈 일이 없는 공간을 청소하기 위해 구석구석 둘러보니, 안에 곰팡이가 슬어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물받이 통, 누군가 정수기 위에 흘린 라면 수프 등 평소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한다. 오늘의 경우에는 쇼케이스 냉장고 옆에 테이블 위에 놓인 시든 꽃이었다.


냉장고가 가동할 때 진동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정용 냉장고와 달리, 유심히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쇼케이스 냉장고만의 소음이 있다. 불침번을 설 때마다 ASMR처럼 들려오던 모터 소리가 쇼케이스에서 나는 소리였다는 사실을, 평소의 무관심으로 인해 이제야 알게 됐다. 자극이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면 자연스럽게 둔감해져 자극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는 걸 내심 깨닫는다. 분명 우리 곁에 존재하는 중요한 것들이더라도, 오랜 시간 곁에 있다 보면 주기적으로 상기시키지 않는 이상 어느 순간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분명 그것들에 의해 우리의 삶은 조금씩 영향을 받고, 그게 쌓이고 쌓여 드라마틱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란색이었다. 인터넷으로 비슷하게 생긴 걸 찾아보니 유채꽃 같기도 하다. 저번에 친구와 나무 이야기를 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는데, 꽃 하나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나의 인식 범위가 얼마나 좁은지 체감하게 된다. 똑같은 걸 보더라도, 보고 있는 것 중에 어떤 것에 집중하냐, 보는 것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냐에 완전히 다른 걸 보게 된다. 비슷해 보이는 것이더라도 다르게 인식하는 능력(이걸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까, 예민함?)의 차이에 따라 자신의 편협한 시각에 갇혀 쉽게 편견을 가지거나, 사소한 차이를 다양성의 일부로서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용사 휴게실 청소를 하다가 발견한 흔하디흔한 시든 꽃 중 하나에 불과할 뻔했던 그 꽃은, 덜덜 떨리는 냉장고라는 변수가 배경에 더해지자 완전히 다른 시각을 제공했고, 그렇게 인식의 전환을 유도했다.


그 꽃이 시든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냉장고가 햇빛을 가려 광합성을 하지 못해서였을 수도, 용사 휴게실을 관리하는 간부가 제때 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혹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요인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가능성보다는 다양하게 생각해야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알아낼 수 있겠지만, 내가 본 원인은 하나라고 확신하고 싶다. 테이블에 딱 붙어있는 냉장고의 모터로부터 전해져오는 진동과 소음, 그 때문에 영하의 날씨에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것처럼 떨어대는 꽃. 내가 보기에 그런 불가항력 같은 환경에 있는 꽃은 아무리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죽음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완전히 시들어버려 꽃잎마저 전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의 의지와는 무관히 꽃은 그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만약 그 진동이 꽃이 시든 근본적인 원인이었다면) 꽃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고통이 죽음 이후의 안식조차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떠는 건 생존을 위한 것이라지만, 꽃의 떨림은 마치 죽음의 연무로서 그녀가 가진 원한을 온몸으로 내비치는 듯했다. 죽음과 긴장의 떨림 속에서 매일을 보낸 꽃의 죽음은, 테이블 위에 놓인 순간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단지 내가 죽음을 목격하기 이전까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


죽음을 맞이해 줄기만 무성하게 남은 꽃, 아니 그뿐만 아니라 불명의 원인으로 인해 죽음에 가까워지거나, 죽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일말의 동정을 느낀다. 내가 가진 미약한 힘으로 그나마 뭘 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테이블을 살짝 들어 올려 옆으로 옮겼다. 10cm 남짓한 짧은 거리지만, 냉장고에 맞닿지 않게 되자마자 보는 사람을 누구나 불편하게 할 법한 떨림이 멈췄다. 그제야 꽃의 시간이 정지했고,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의 움직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공간에서 무심하게 떨리는 냉장고의 진동소리의 자극만이 내 귓속으로 전해져온다. 방을 나가기 전,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주우니, 드디어 내 임무가 끝난 듯해 마음이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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