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기쓰는 복학생 Feb 13. 2023

[군대 독후감]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고

일본인이 왜 소세키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은 책

그동안 일본 문학하면 아는 작가라고는 다자이 오사무와 무라카미 하루카 단둘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오사무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자연스럽게 유명한 일본 문인들의 이름을 접하게 되었고, 그중에 21세기 들어 아사히 신문에서 선정한 일본인이 사랑한 문인 1위에 선정된 나쓰메 소세키에 관심이 생겼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9위)와, 현시대 가장 인기 있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12위) 같은 내로라하는 문인들을 제치고 일본인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그의 대표작이자, 소세키 문학의 정수가 담겨있다는 평가를 받는 <마음>을 읽었다.


내용은 상당히 평이하다. 책을 2번 읽고 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주인공인 ‘선생님’은 작중 1부의 화자인 나에 의해 결말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걸로 못 박힌다. 1부는 ‘나’의 시점(1인칭 관찰자)에서 진행되면서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으로서, 취직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냐의 문제로 고민하는 시기에 임종을 앞둔 아버지와 선생님 사이에서의 내적 갈등을 담아낸다. 1부의 결말에 이르면서 기회가 되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던 선생님이 본인의 자살을 예고하는 동시에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고, 고향에 남아 위독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냐, 아니면 선생님을 만나러 도쿄로 가냐의 갈림길에서 선 '나'는 결국 선생님을 택하고, 도쿄로 향하는 열차에서 편지를 읽어보기 시작하며 1부가 마무리된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까지 전체 줄거리의 절반이 걸리기에, 짧고 재밌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음>의 서사구조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을 거다.


1부와 달리 2부는 선생님의 시점에서 본인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지역 유지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매우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장티푸스로 부모님이 둘 다 돌아가신다. 막대한 양의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부모님이 생전에 그토록 신뢰했던 작은 아버지가 자신을 배신하고, 유산을 빼돌려 위태롭던 사업을 부흥시키는데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학생 신분으로서 재산을 돌려받기 위한 소송 과정을 거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재산의 극히 일부(그럼에도 엄청난 양이었지만)만을 가지고 고향을 완전히 떠난 채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됐지만, 새롭게 머물게 된 하숙집에서 미망인인 주인아주머니와 외동딸과의 진실한 관계를 맺으면서 점점 마음을 열어가게 되고, 딸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기 시작한다. 1부에 등장했던 선생님의 처가 그의 과거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외동딸이 처가 될 거라는 사실은 의심하기 힘들었다(그리고 그렇게 됐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평탄할 것만 같았던 그의 삶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내성적이라 평소에 말이 없고, 학과 선택 과정에서 생긴 갈등으로 양가에 의절 당해 음침하게 생활하던 고향 친구 K를 걱정해 그를 자신이 사는 하숙집으로 데려온 거다. 좋은 의도로 데려왔지만 하숙집에 오자마자 K는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이 사모하던 하숙집 딸과 유독 친밀한(비 오는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같이 걷는다던가, 그의 방에 데려와 둘이서 오손도손 대화를 나눈다던가 등) 모습을 보였고, 급기야 자신(선생님)에게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까지 한다. 외모, 지적 능력 등 여성에게 어필할 만한 매력에 있어 모두 K에게 밀린다고 생각해, 이대로면 그녀를 뺏긴다는 위기의식에 빠진 그는 결국 K 몰래 자신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하숙집 사모님에게서 딸과의 결혼 승낙을 받아내고, 그렇게 친구를 배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배신의 결과로, 혼자가 된 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K는 자살한다. 다시 읽어보면 줄거리가 참 너무 뻔하고 단순해 오히려 클리셰에서 벗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데, 세세한 부분을 빼면 정말 줄거리가 이래서 딱히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소꿉친구에 대한 마지막 배려에서인지, 자살과 함께 남긴 유서에 딸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가 너무 박약해서 도저히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더 일찍 죽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 있었는가" 하는 말만 남겼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남긴 K의 인간적인 배려는 오히려 선생님에게 비수가 되었고, 평생 인생에 드리운 채 그를 괴롭히는 그림자가 된다. 그렇게 K는 자살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과거 자신을 배신해 평생을 증오해 온 작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아집과 이기심에 소중한 사람을 희생시키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그에게 일깨워주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 어둠 속에 행복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선생님에게 완벽한 복수를 선사한다.


이전에는 자살은 비겁한 회피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래서 K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과거를 상당히 부끄러워했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회피가 아니라 당당히 시련을 마주한 채 저항하고 반항하는 게 옳은 삶의 태도라고 생각해왔다(사실 카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크다). 그러나 자살이 주된 소재로 등장하는 일본 소설을(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과 인간실격) 읽어보면 시대의 흥망을 불문하고 나타나는 자살에 관한 독특한 시각을 발견한다. 실제로 할복과 같은 문화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과거 일본에는 자살을 삶을 명예롭게 유지하는 일종의 수단으로 여기는 관습 같은 게 있었던 건가 막연하게 추측해 본다.


사실 <마음>은 서사의 전개에 있어 그다지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온갖 반전과 서스펜스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현대의 소설들에 비하면 기술적인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야기가 정말 예상했던 그대로 흘러갔으니까. 그러나 아집과 이기심이라는, 악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독백체로 투명하게 드러내는 그의 탁월한 필력과, 동시에 선생님이 가진 예민한 윤리의식으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쩌면 만인 공통의) 이중성은 상당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어찌 보면 서사 자체가 반전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든 구조라 그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내면이나 심리를 읽는데 더 쉽게 집중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가끔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만 신경 쓰느라 각 등장인물들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소홀해졌던 경우를 생각하면(최근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그런 경험을 했다), <마음>을 읽을 때는 스토리를 제쳐두고 선생님의 독백 속에 그의 내면을 읽어내는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그의 책을 더 많이 읽어봐야 하겠지만, 대표작 하나만으로도 그가 사랑받는 이유를 확인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살로서 완성한 완벽한 복수, 여타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르게 K의 행동이 비겁하기보다는 오히려 애처로운 동시에 현명해 보이기도 하다. K라는 인물에 동정과 동경을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그동안 자살은 필연적으로 맹목적이기에 하면 안 된다고 여기다가, 삶을 바침으로써 어떤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자살에 생각했던 것보다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게 타인의 눈에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더라도, 죽음으로써 뭔가를 보여주려고 한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바치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심장 깊은 곳에 품고 있으리라. 자살로써 삶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겼다는 걸 느낀다.


소세키에 대해 더 알고 싶게 만든 책이었다. 규슈 여행을 떠나면 구마모토에 있는 나쓰메 소세키 저택에 가보고 싶어졌다. 

작가의 이전글 훈련 중 밤하늘을 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