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이 있다는 걸 새삼 느끼는 하루
동대문 시장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5~10분 정도 걷다 보면 금세 광장시장인데, 종로5가역 근처에 있어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동안 외국인, 특히 일본인이 정말 많이 보였다. 아마 동대문에서 시작해서 청계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서울 구도심의 상점가를 돌아다니는 게 그들에게 일종의 관광코스인가 보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고서점이나 잡화점에 재밌어 보이는 물건들이 많기는 했지만 구매 욕구를 자극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줄어든 이 오래된 상점가가 오히려 외국인들에게는 매력적인 투어 장소라는 게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진다. 하긴 우리도 일본 감성 거리를 걷겠다고 시타마치를 찾아 나서는 걸 보면 현지인들만 갈 것 같은 장소를 선호하는 건 만국 공통의 습성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이 화요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광장시장에 많은 인파가 몰렸다. 예전에 간 마약김밥 집을 다시 가보고 싶어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조금 큰 가게들은 다 둘러봤는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가게가 사라진 건지 결국 찾지 못했고, 어떤 걸 먹어야 하나 고민하며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와중에 외국 잡화 가판대를 발견했다. 녹차 킷캣이나 곤약 젤리, 초코비 등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일본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옆에 있던 일본인 여행객들이 그것들을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일본에서 어떤 인지도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우리로 치면 아메요코나 츠루하시 같은 곳에서 양파링이나 포스틱을 파는 것 같은 건가. 스시, 오코노미야키, 타코야키, 그리고 포스틱!! (내 최애과자)
결국 맛집을 찾는 건 포기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광장시장에 왔는데 아무것도 안 먹고 가기는 그래서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 육회 집에 들어갔다. 처음 들어갔을 때 손님은 우리뿐이었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니 하나둘씩 들어왔다. 점심을 먹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지라 육회를 1인분만 시켰는데, 마침 같이 온 친구가 육회를 거의 안 먹어봤다고 말했다. 육회 정도면 한국 사람들에게 꽤나 대중적인 메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당연히 먹어봤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타인에게는 도전이 될 수도 있다니, 새삼 사람마다 각자 사는 세상이 다르다는 사실을 느낀다. 어디서 만들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 메뉴인지, 육회는 맛있었다. 평소에 고깃집에서 먹는 육회는 배즙이랑 배채가 어우러져서 달콤함이 강조된다면, 광장시장 육회는 소금장을 곁든 담백함이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초등학생 입맛인 내 입장에서는 단 맛이 나는 게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광장시장을 나온 후 청계천을 따라 걸으면서 수많은 다리와 사람들을 봤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여서 그런지 주변 회사원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주로 가족이나 연인 단위의 관광객들이었다. 청계천 강변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던 찰나 옆에 청둥오리 부부 한 쌍과 중대백로(이 새의 이름을 청계천 생태를 검색하고 나서야 알았다)를 구경하고 있는 여인의 에코백에 한지 종이 공예 세트가 들어있었는데, 보통 한국인이 애들이 아닌 경우에 그런 걸 갖고 다닐 확률이 높지 않아 단번에 외국인이라는 걸 확신했고, 역시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일본어)를 사용했다. 익숙한 풍경에서 낯선 사람들을 여럿 보게 되니, 나름 코로나와 함께 찾아왔던 분단과 고립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한 달 뒤 다른 나라의 길을 걷다 보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비슷한 느낌을 주게 되지 않을까.
얼마나 걸었을까, 모전교와 폭포가 보이면서 청계천의 끝이 나타났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청계천 상류의 폭포수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러나 호기심은 오래가지 않았고, 거리로 올라오자마자 Frisbee가 눈에 들어와 애플 제품을 구경하러 갔다. 아이폰으로 바꾸기로 거의 반쯤 확정했는데, 계산해 보니까 노트북이랑 패드, 시계 등 애플로 맞춤을 하려면 돈이 최대 500까지는 들 텐데, 애플 애호가, 소위 앱등이의 삶을 산다는 건 합리적 소비라는 가치 따위는 내팽개쳐야만 가능해 보인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나이키, 애플, 맥도날드, 스타벅스, 코카콜라 같은 브랜드가 넘쳐나는 것과,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물질적인 것의 비중이 높은 건 무슨 관계일까. 그 고민을 하던 와중에도 광화문 광장에 새로 리뉴얼했던 스타벅스에 갔다. 비록 카라멜 마키아토는 상당히 맛있었지만, 달콤한 맛 뒤에 찾아오는 씁쓸한 느낌은 피할 수 없었다.
광화문 광장 스타벅스에는 다른 곳과 달리 루프탑이 있는데, 겨울이 끝나 날씨도 따뜻해졌겠다 그곳에서 광화문 광장 경치를 바라보며 인생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한국의 관광산업으로 시작해 코레일과 국내 철도 산업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군대 전역 이후 미래에 대한 모호한 목표와 계획 그에 따른 고민거리들로 넘어갔고, 결국 으레 그래왔듯이 학창 시절에 대한 무의미하지만 불가피한 후회와 반성으로 귀결되었다. 진부한 유형의 이야깃거리지만, 그 진부함 속에서도 매번 새롭게 찾아내는 것들이 있고, 상황 자체의 분위기가 주는 편안함은 마치 내 방 침대 같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6시에 시청이 문을 닫기 전에 새 여권을 교부받아야 해서 4시가 좀 넘어 곧장 돌아갔다. 경복궁역 3호선에서 도곡으로, 도곡역에서 수인 분당선(여전히 분당선이 익숙하지만)으로 갈아타 한 시간 좀 넘게 가 야탑역에 도착하니 5시 30분이었다. 걸어가도 충분히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약 1km), 공무원과 공공서비스에 대한 불신이 무의식에 깃들어 있어서인지 뒤꿈치를 잡아주지 못하는 단화를 신고 냅다 뛰었다. 가뜩이나 아킬레스 건염 때문에 하루 종일 걷을 때 불편했는데, 5분 정도 쉬지 않고 뛰다 보니 늦지 않게 도착하긴 했지만 모처럼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은 내 몫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게 웬걸, 유효기간이 남은 구여권을 안 들고 와서 결국 빈손으로 돌아갔다. 누가 읽거든 여권 재발급 받을 때 꼭 유효기간 남은 여권 가져가세요.. 카카오톡으로 알림 올 때 알려주지만 전 까먹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