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로서 서울의 새로운 모습 발견하기
휴가를 나갈 때마다 주로 사람을 만나거나 집 안에만 있고, 도시를 돌아다닌 적은 별로 없었는데, 이전과 달리 여행에 큰 관심이 생겼고, 오랜만에 쇼핑도 할 겸 친구를 만나 서울 거리를 돌아다녔다. 3년 전에도 한 번 와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풍경 자체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당장 겉으로만 봐도 쓰러질 것만 같아 재개발이 시급해 보이는 시장 건물, 좁아서 두 사람도 지나가기 힘든 통로 등 시장이 제공하는 풍경은 100년이 지나도 그대로 일 것 같은 느낌은 왜였을까. 3년 전과 달라진 거라곤 더 이상 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과, 확실히 늘어나 쉽게 눈에 들어오는 외국인 관광객들 정도였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아무 생각 없이(있었다면 사회에 대한 불만 정도) 그저 도시의 오래된 풍경을 바라보던 그때와 달리,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까지도 삶에 대한 수많은 고민거리들에 그럴듯한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들에 하나하나 의미 부여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분당선 수내역에서 출발해 왕십리역에서 내리고, 그곳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갔다. 10~11시 정도면 사람이 그다지 붐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이 많아 가는 내내 벽에 기댄 채 갔다. 자리에 앉지 못하면 불편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열차 안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사색에 빠지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운 경험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내린 후 친구를 만나 근처에 있는 카포스토어(대형 축구용품 숍)에 들렀다가 근처 북촌손만두에서 갈비 만두와 피냉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후 동대문 일대를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온 동대문의 풍경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다. 폐건물이라고 해도 믿을 듯한 신발도매시장의 허름한 건물도 그렇고, 수십 년 동안 서울의 역사를 잘 간직해오고 있는 시장과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로서 수백 년간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흥인지문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건 성 전체가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수원 화성과 달리 성문만 덩그러니 있고, 양옆의 성벽은 끊어진 채 그 위에 놓인 도로로 차들이 지나다녔다. 만약 서울 도성이 여전히 원형을 유지한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관광 랜드마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랬다면 도시 개발에 있어 엄청난 차질에 생겼을 테니까, 당시 고속으로 발전하는 사회에서 그런 부분까지 고려할 순 없었을 거다.
동대문 시장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물건이 한데 모여있었다. 브랜드 별로 나름 엄선해서 진열하는 백화점이나 쇼핑몰과 달리, 정말 아무 물건이나 다 들여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가지각색의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전통시장이 젊은 층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이유를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 많은 상품들 중에 쏙 마음에 들만한 건 좀처럼 찾기 쉽지 않았다. 구경하는 재미는 있는데 정작 좋은 게 너무 없어 뭘 골라야 할지 고민하는 상황, 풍요 속 빈곤이라는 말이라는 표현이 제일 적당해 보였다.
원래 여행 다니면서 쓸 밀짚모자를 사려고 일부러 시장을 찾은 건데, 모자 외에도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디자인의 의류나 신발이 몇 가지 눈에 들어오기도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뭐라고 할까 시장 물건은 나이키 에어조던이나 아이폰 같은 끌림이 없다고 해야 할까. 5만 원 정도 하고 디자인도 비슷해서 사면 만족할만 한데도 불구하고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요즘 메이저 브랜드들이 하는 것처럼 소비자의 비합리적 욕구를 자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추측한다. 우리 안의 본능적인 비합리성이 분명 더 비싼 가격임에도 그런 것들을 사게 하는데, 모두가 따라 하다 보니 어느덧 합리적 소비가 개성이자 패션인 세상이다. 그 흐름에 따라가려 아둥바둥하는 노력하는 내 모습이 때로는 참 애잔하게 느껴진다. 옷 좀 입어보겠다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사봤지만, 정작 나가려고 옷장을 열어보면 입을 게 없는 상황이, 마치 한국의 출산 장려 정책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뭐 그래도 여기 온 목적대로 온갖 모자 가게를 둘러봤는데, 생각보다 내가 찾는 챙이 큰 밀짚모자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건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난 다른 사람에 비해 머리가 크다.(같이 간 친구의 머리 치수가 54, 내가 59였다….) 이전에 선임이 나 같은 사람은 무조건 챙이 큰 모자를 써야 한다고, 그렇게 안 하면 큰 머리가 더 부각된다고 조언해서 어찌어찌 찾아보긴 했는데, 딱 내 이상에 완벽히 맞는 모자는 찾지 못했고, 결국 크기는 좀 작지만 그래도 최대한 비슷해 보이는 걸로 골랐다. 앞으로 이 녀석을 안 잃어버리고 잘 데리고 다닐 수 있으려나. 우선 머리는 잘 들어가서 색도 나쁘지 않겠다 무턱대고 구매했다. 나중에 보니 사이즈표에 적힌 57.5cm라는 숫자가 왜 이렇게 불안하게 다가올까. 그래도 모자야 앞으로 여행에서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