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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ul 13. 2023

지우개 꿈

꿈을 꿨다. 내가 자주 가던 동네 모닝글로리 문구점 입구에 서서 뭘 살지 고민하는, 그 고민의 순간이 마치 영겁처럼 느껴질 정도로 긴 꿈이었다. 분명 얼마 남은지 모르는 카드 잔액은 한정적이니까 원하는 걸 아무거나 무턱대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문구점에 들어온 이유가 분명 있었을 거다.

그렇게 고민의 시간이 흘러 결정이 내렸고, 필기구(볼펜) 코너 맞은편에 있는 지우개 코너에서 늘 쓰던 Ain(아인) 지우개를 하나 집어갔다. 새거랑 비교하면 그동안 써온 지우개가 하도 닳아 정말 작아졌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쨌든 때도 안 타고 커버도 온전한(지우개가 닳을 때마다 크기에 맞게 커버를 자르곤 한다) 새삥 지우개를 챙기고 문구점을 나섰다.

그게 단순하지만 길었던 꿈의 끝이었다. 꿈에서 깬 후 너무 현실 같아서 필통을 열어보니 역시나 안에는 헌 지우개가 있었다. 만약 내가 저 지우개를 쓰려면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려나. 문득 생각해 보니 좀처럼 지우개가 닳지 않던 지난날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예전만큼 필기구를 쓸 일이 좀처럼 없다. 필기도 볼펜 아니면 키보드로 타이핑하는 게 대부분이어서 글 쓰는 게 아니면 샤프는 거의 쓸 일이 없다고 해도 무방한데, 심지어 요즘에는 절대적으로 글에 할애하는 시간도 줄어들어서 동시에 실수를 고치려고 지우개를 쓸 일은 더 줄어들었다.

보통 글을 다섯 편 정도 쓰면 샤프심을 바꾸게 되는데, 한 통에 40개가 들어있으니 200편을 쓰면 그제야 한 통을 비울 수 있다. 원래 하루에 한 편 정도 쓴다고 가정하면 1년에 대략 2통 정도를 쓰는데, 그에 반해 지우개는 해가 지나도 도저히 새 걸 사야할 정도로 닳지를 않는다. 과거의 습관을 꾸준히 유지하지 못해서 글 쓰는 양도 예전만 못하는데 앞으로는 바빠지면서 더더욱 지우개 쓸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고작 천 원도 안 되는 지우개 하나 새로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 꿈에서 나온 너무나도 현실적인 장면이 이상보다도 더 멀게만 느껴진다. 언제쯤에야 찾아올까. 막연한 미래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더더욱 막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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