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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Jul 21. 2023

착취의 구조

군대에 있을 때부터 나름대로 고민해 온 주제고, 가설에 맞는 사례들을 하나씩 접하는 변증법적 접근을 취하면서 생각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사병을 최저임금도 안 되는 금액으로 쓰면서 오히려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며 과거의 반인권적 행태를 옹호하는 간부들, 1인당 GDP가 5만 달러에 육박하면서 건설 현장 노동자들에게 월급으로 고작 1000 AED(한화로 약 36만 원)를 주는 두바이의 아웃소싱 노동시장, 최저임금이라는 적당히 획일화된 기준 아래 가치를 평가절하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걸 자양분으로 삼으며 누리며 살아가는 나.



중동 여행 동안 시간이 많이 남아 틈틈이 핸드폰으로 중동 정세에 대해 여러모로 알아봤는데, 그들이라고 싸잡으면 안 될 정도로 복잡하고도 다양한 중동을 설명하기에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이슬람’, ‘테러’, ‘석유’등의 키워드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강대국들의 주도 아래 행해진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체계로부터 생겨난 무질서.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이어지는 혼돈과 그로 인한 수많은 비극, 그리고 그런 맥락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찾아오는 차갑다 못해 데일 듯한 멸시의 시선(미국 비자를 받는데 이라크 등 몇몇 중동 국가에 방문한 이력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보고하도록 요구받는다) 속에 서로 긴밀하고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착취의 구조를 발견했다.



필히 가치가 높아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하는 세상은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말. 긍정적인 태도 속에 타인을 위로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세상이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로 나뉜다는 불편한 현실을 내포하는 듯하다. 이분법적 접근이라기에는 착취를 행하냐와 당하냐의 기준은 매 순간 변하기에 누군가가 착취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이중성을 보이는 건 비일비재하기에, 누군가를 한쪽으로 분류하는 건 무의미해 보인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복잡한 사회를 살아간다는 건 누군가를 착취하고, 누군가에게 착취당하는 비극의 고리 안에 종속되는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Made in China”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저렴한 공산품과 양질의 서비스의 이면에 숨어있는 불편한 현실을 어느 시점부터 인지하게 되었지만, 반쯤은 모른척하며 거부하지 않은 채 누리며 살아가는 나는 분명 착취자다. 한 달에 1000 AED 받고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지은 건물의 전망대에 올라 인스타에 올릴 야경을 찍고, 한 끼에100 AED씩이나 하는 식사를 갖는 여행 중 즐거운 순간 속에서도 이 기묘한 착취의 순환 구조에 속해있다는 사실에 불편한 감정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뫼비우스 띠와도 같이 입구도 출구도 없이 꼬인 듯이 엮여있는 착취의 구조 속에서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구분하는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이전에 겨울방학 동안 잠시 한국에 온 친구를 휴가 나오면서 만났을 때, 온라인으로 1년을 학교생활을 보낸 나를 놀리는 듯한 뉘앙스였던 그의 한 마디가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래도 너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장학금 받고 학교 다닌다”



뭐랄까 공격성이 내포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순간 그 말에 일종의 불쾌감을 느낀 건 그 한 마디에 내포된 세상의 합리적인 불합리성에 의해 착취당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비록 내가 선택한 것이지만 생각할수록 스스로 착취당하기를 선택함으로써 함정에 빠진 게 아닐까 하는 회의감을 지울 수 없었다. 한순간 내린 선택에서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듯한 복잡한 착취의 구조, 어느 순간 그 존재를 깨달았지만 정작 그걸 해결하기 위해 하고 있는 건 딱히 없기에(해결해야 할 당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무기력한 분노를 그저 터뜨리지 못하고 감출뿐이다. 그리고 그건 타인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착취로 이어진다. 그 대상이 누군가 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비극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선 좀 더 절박해져야 하는데, 나도 이런 상황을 즐기는 건지 행동에서 의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착취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고 말했다. 그 인생의 부조리 앞에 분노를 품지만 동시에 착취의 수혜자라는 비극적 현실을 잘 알기에 비겁하게도 위선적인 침묵을 유지할 뿐이다. 이제 머지않아 한 달 뒤면 미국으로 향하는데, 새로운 공간에서 나는 무엇을 누리면서 동시에 무엇을 빼앗길까. 한국과는 다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마주할 착취의 구조는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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