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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Aug 18. 2023

D-day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안에서 적은 생각들

전날에 3시간 정도 밖에 안 자서 상당히 피곤했지만, 새로운 생활에 대한 불안감에 잠들지 못하다 결국 잠들기를 포기하고 시차 적응을 하기 위한다는 핑계로 친구와 롤을 했다. 그래도 정신이 멀쩡해야 뭔가 문제가 생길 일이 없겠다는 생각에 한두 판만 하고 자려고 했으나 이기면 이겼다고 한 판 더하고, 지면 졌다고 한 판 더하는 악순환에 굴레에 빠져, 마지막 게임을 끝내고 침대에 누우니 아침 7시였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챙긴 캐리어에다가 뭔가 빼먹은 게 있나 마지막으로 확인했는, 어떻게든 내 가방에 햇반과 컵라면 하나라도 더 넣으려는 억지에 가까운 부모님의 행동에 어서 빨리 가방을 잠가버리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엄마 아빠 걱정 시나리오에서는 내가 현지 음식이 입맛이 안 맞아 한식을 먹어야 하는데, 돈을 아끼려고 억지로 안 먹어 고생하는 내용만 있는 건가. 사실 어떤 딱히 한식, 중식, 양식 이런 거 안 가리고 입맛이 둔감하다는 사실을 홀로 떠난 몇 번의 여행과 1년 반의 군 생활을 통해 깨달았는데, 어떤 면에서 부모님이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정보의 불균형을 차치하고서라도, 여행용 가방에 그런 것들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기우에 가깝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모의 자식 걱정을 덜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결국 더 말 안 하고 가방에 넣었다.


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 당분간 못 볼 한국의 풍경을 최대한 눈에 담아보려고 했지만, 어디까지였더라 안양까지는 본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 문에 기댄 채 잠들어 인천 대교의 풍경은 보지 못했고, 눈을 떠보니 이미 터미널 주차장에 다다라있었다. 5년 전에 개항한 이후로 대한항공을 타지 않아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는데, 4월에 두바이 갔을 때 이후로 짧은 기간 사이에 2번이나 왔네. 이번에는 가져갈 짐도 많고 미국에 혼자 가는 건 처음이라 직항을 타는데, 나중에는 비용 절감을 위해 되도록 외항사를 쓰면서 경유를 할 생각이다.


되도록 오전 시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에서 오후 4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탔고, 결국 스케줄상 이번에 탈 수 있을 거라 기대하던 B-787 대신 B-777을 타게 됐다. 어차피 이코노미석을 타는데 기종이 그렇게 상관이 있나 싶기도 한데, 나름 여객기에 관심이 많은 항덕에게 무슨 비행기를 타냐는 꽤나 중요하다. 예전에 LA에 갔을 때 아시아나에서 도입한 최신 기종인 A350 탄다는 이유 하나로 여행이 내내 설레고 새로운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


어찌 됐든 B-777도 처음 타는 거라 이번 기회를 통해 B-787을 제외한 보잉과 에어버스의 모든 기종을 타보게 됐다. 언젠가 한 번 B-787도 타봐야 하는데, 아마 내년에 한국에 돌아갔다가 미국으로 들어갈 때 에어프레미아를 타면 가능하지 않을까.


공항에서 도착하니 1시 좀 넘은 시간이었다. 잼버리가 끝나면서 돌아가는 사람들도 그렇고 지금 같은 시기에 미국행 항공편 수요가 높아서, 4개월 전 두바이행 비행기를 타려고 왔을 때보다 공항이 훨씬 붐볐다. 그렇다 해도 제1터미널에 비교하면 한참은 부족하지만... 저가항공사들이 진에어 말고는 없어서 일본이나 동남아 쪽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1터미널로 가는지라 공항에서 줄을 서면서 기다리느라 시간을 소모할 일은 별로 없어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수하물을 부치려고 했는데, 또 부모님의 클리셰인 “혹시 모르니까”가 나오면서 필요한 걸 여행용품 가게에서 찾아보고 난 후 부치자고 제안했다. 정작 가서 살만한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없었지만, 부모님에게 등 떠밀려 여태까지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목베개를 샀다. 솔직히 이런 거 굳이 사라 필요가 있나 싶긴 한데, 내 돈을 내는 게 아니라 군말 없이 감사히 받아 갔다. 아직 인생사는 것까지는 몰라도 혼자 돌아다니는 건 그럴듯하게 할 수 있는데, 아직까지 부모님에게 나의 상황 대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미 이전에 혼자 여행 다니면서 어느 정도 증명했다고 생각했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어떻게든 뭔가를 가르치려 드는 게 이해가 되면서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엄마 아빠 둘 다 제2터미널은 처음인지라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전망대 카페에 가서 계류장 비행기들을 구경했다. 왜 아시아나는 여기에 없냐는 부모님의 물음에 대충 제2터미널은 대한항공하고 스카이팀 전용 터미널이라, 스타 얼라이언스에 속한 아시아나랑 기타 국내 저가항공사들은 제1터미널을 쓰고, 아직 확장 공사도 안 끝나서 대한항공 소속 여객기를 제외하면 여기서 비행기가 그렇게 많이 뜨고 내리지는 않는다고 설명해 줬다. 나와는 그다지 관련 없는 정보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걸 보면, 내가 참 진성 나무위키 유저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어느새 탑승 시간까지 30분도 안 남아 자리를 떴다. 평소에는 최소한 탑승 시간 한 시간 전에는 무조건 출국장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예전부터 잔소리해오던 부모님도, 이번에 가면 거의 9개월 동안 못 본다고 생각해서일까 느긋하게 있다가 가라고 말했지만 여기서 더 지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출국장 앞에서 가벼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홀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3시가 다 돼서야 들어가서 안을 둘러볼 시간 따위는 거의 없었다. 남은 원화를 좀 쓸까 하는 생각에 면세점을 좀 둘러보려는 계획은 그대로 취소. 곧장 게이트로 갔는데 확실히 터미널이 작아서 그런지 248번 게이트에 금방 도착했다. 단일 터미널만을 사용해 터미널 내부에서 셔틀 트레인이 다니는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과 당장 옆에 제1터미널만 봐도 게이트 사이를 도보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일이었는데, 괜히 조금이라도 더 일찍 들어가려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어딘가로 이동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탑승 20분 전에 벤치에 앉아 할 것도 없고, 반쯤 멍 때린 채 주변을 둘러봤는데, 이맘때에 한국인 유학생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대부분 한국계 미국인(미국 여권을 들고 있었다)과 인천을 경유하는 중국인 혹은 인도인이었다. 한국인도 대부분 어린애들이랑 다니는 가족이었는데, 유학생이라는 경험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이라 확실히 보는 시선도 지극히 유학생이라는 좁은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 중에 유학생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상당히 편협한 사고방식이었네.

그렇게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에 들었고, 그 덕에 하마터면 기내식 주는 것도 놓칠 뻔했다. 출발하기 전에 친구에게 기내식으로 꼭 비빔밥을 먹겠다고 약속했는데, 한식이 도토리묵밥이어서 결국 양식인 비프스튜 파스타로 골랐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대한항공 양식 메뉴에 나오는 빵에다가 버터를 발라먹는 게 정말 맛있다. 평소에 빵을 잘 안 먹고, 버터는 아예 찾지도 않는데, 비행기 내부라는 특수한 상황이 작용해서 그런가 빵에 버터를 발라먹는 게 이렇게 행복한 경험이 된다는 건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앞으로도 미국에서 이런 식으로 자주 먹어봐야 하나.


식사를 마치니, 미뤄놨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거의 기절하듯이 잠들었고, 일어나니 벌써 도착까지 5시간 밖에 안 남았다. 비행기 안에서 글도 쓰고,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도 완독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딱 3시간 남은 시점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풀로 집중한다면 불가능할게 전혀 없지만 요즘 집중력이 상당히 안 좋기에 11시간 동안 300쪽짜리 책 한 권 다 읽는 것도 꽤나 어려운 일이다.


지난번 두바이 여행 때는 2-4-2 배치 좌석에서 창가인 내 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아 홀로 두 자리를 차지한 채 편하지만 동시에 조금은 외로운 비행을 했는데, 그에 반해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빈 좌석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수요가 너무 높아 못 탄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 내 옆에 탄 사람은 초등학생 정도 된 것 같아 보이는 삼 남매를 둔 가족이었는데, 대충 보니 아빠가 같이 따라나서지 않는 걸 보면 애들은 엄마와 함께 학기 시작에 맞춰 미국에 돌아가는 거거나, 본래 다 미국에 살지만, 한국에 잠시 들렀다가 돌아가는 거일 수도 있겠다.


이 가족을 보니 뜬금없이 우리 팀 추신수 선수 생각이 난다. 지난번에 6월 말에 문학야구장에 갔을 때, 아이들의 방학 중 한국에 들어와 남편인 추신수 선수의 경기를 보러 온 하원미 여사와 추무빈군을 직접 본 적이 있었는데, 티비에서나 유튜브에서나 볼 수 있던 사람을 가까이서 실제로 보게 된 게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안에서 방학 기간 동안 한국에 와서 아버지의 경기를 구경하는 모습과 어딘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는 가족을 보면서 가족과의 시간을 타협하면서 야구 인생의 황혼기를 고향인 한국에서 마무리하는 추신수 선수의 모습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졌다. 올해 은퇴를 안 한다면 내년에 돌아가서 추신수 마킹으로 유니폼을 하나 살까. 한국 역대 최고의 야구선수인 추신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들을 올해 열심히 눈에 담아둔 건 다행이네.


처음 예매했을 때 굳이 창가 쪽 자리를 욕심내 미리 자리를 잡아버려 의도치 않게 가족 셋이 같이 못 앉게 만든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살면서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미안함이 드는 순간들이 꽤 있는데, 오늘이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그런 내가 해줄 수 있는 소정의 보상은 옆에서 열심히 영화를 보다가 잠든 아이에게 최대한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독서등을 끄면서 비행기 안에서 끝내기로 결심한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내려놓는 것 밖에 없었다. 옆 두 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모두 잠든 채 움직이지 않아 나갈 수 없게 되었지만, 당장 급한 것도 없고 가만히 있는 것쯤이야 이 시끄럽고 불편한 비행기라는 공간에서 그들에게 평화의 시간을 선물하기에 그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흠… 이제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딱 하나만 더 얘기해 보자면 아까 막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남자아이가 엄마에게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싶다고 얘기하자, 엄마는 너무나도 당연하듯이 우리는 돈이 그 정도로 많지 않아 탈 수 없다고 답했던 게 내리기 직전인 지금까지 머리에 맴돈다. 예전에 나도 비행기에서 엄마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는 나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꼭 엄마랑 아빠도 같이 태워달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무조건 프레스티지라든지 퍼스트 클래스라든지 하는 것들을 타기만을 위한 인생을 사는 건 아니지만, 분명 단순히 돈이 없어라고 일축하고 타협할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욕심이 모여 유학을 가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이제 막 그 생활을 시작하는 지금도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나도 그렇고, 팔을 내 자리까지 올려버린 옆의 친구도 언젠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욕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실현할 수 있기를 내심 바라본다. 우선 그러려면 가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은 좀처 떨쳐내지 못한다.


20kg을 넘는 짐을 두 개나 들고 있는지라 버클리 카톡 오픈 채팅을 통해 같은 비행기를 탄 사람과 우버 셰어를 하기로 했는데, 미국에서 우버도 처음 타보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하고 같이 차를 타는 것도 처음이다. 여기 오니까 뭐든 다 처음 해보는 일들 뿐이네. 앞으로 학교생활 자체가 이런 식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과정의 연속일 텐데, 익숙한 관계에서 오는 편안함의 반복을 끝내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도 잘해낼 수 있을지 확신 따위 없는 채 비행기에서의 한 시간 반 정도의 생각 끄적이기는 여기서 마무리한다. 나머지는 집 도착해서 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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