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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Aug 18. 2023

내 광복절은 40시간이었다

처음 해보는 미국 생활, 그 첫날

현지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한국에서 15일 오후 4시에 출발한 걸 생각하면 시간이 5시간이나 뒤로 흘러갔다. 한국에서 캘리포니아 해안가 지역으로 여행을 가면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오늘이 광복점이라는 점에서 이런 경험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전에 우버 셰어링을 하기로 한 사람과 짐 찾는 곳에서 만나, 잠시 길을 헤매긴 했지만 금방 승강장이 있는 곳을 찾았다. 우리가 부른 차는 진한 회색의 도요타 시에나였는데, 짐을 트렁크에 실어주려 차에서 내린 기사는 우리를 보자마자 你好라고 말하며 인사를 건넸는데, 중국어를 일부 알아들을 수 있지만 일부러 못하는 척 대충 얼버무렸다. 어제 만난 중국인 교환학생 룸메와 대화하면서 안 사실로는 중국인 입장에선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 사이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꽤 분명하게 드러나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 나와 달리, 13억이라는 워낙 큰 인구를 가진 중국인 입장에선 그렇지 않은가 보다.



우버를 타고 가는 길에 창틀에 턱을 괸 채 창밖으로 펼쳐지는 베이 에어리어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샌프란시스코 시내 풍경을 카메라로 찍을까 했는데 어차피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캘리포니아의 풍경을 어떻게든 사진으로 남기려고 하는 것보다 처음 보는 지역의 풍경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에 집중하고 싶었다. 나중에 불완전한 기억 속 풍경으로 남더라도 아무렴 괜찮았다. 단순히 설렘과 불안의 조합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생각의 실타래가 머릿속을 통통 튀어 다니는 듯한 상황에서 마음을 진정시킬 유일한 방법은 저 드넓은 만에 시선을 맡긴 채 이 거대한 광역권에 품긴 만을 빠져나가는 수많은 대형 화물선과 만 너머에 있는 건물들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바다와 맞닿아있는 곳의 지대가 낮아 해수면이 상승하면 언제든지 잠길 것 같은, 한국에서는 주차장에서나 볼 법한 콘크리트로 만든 도로, 길을 지날 때마다 나타나는 WhatsApp을 제외하면 온통 처음 보는 브랜드밖에 없는 대형 광고판, 정말이지 미국스러운 풍경이었다. 가는 길에 동승한 사람에게서 학교생활과 공부에 관한 이야기, 버클리 내부에 강하게 형성되어 있는 한인 커뮤니티, 그리고 내가 잘 모르는 버클리 외 지역에 관한 꿀팁들까지. 동갑이었지만 학업적인 면이나 생활적인 면이나 나보다 훨씬 앞서 있는 듯한 사람과 대화하면서, 18개월 동안 군 생활한 게 전혀 면책사유가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버클리 시내로 들어가서 느낀 바로는 집들이 정말 오밀조밀하게 모여있어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인터넷에서 묘사한 것처럼 거리에 노숙자가 널려있는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거였다. 중심가 쪽만 다녀서 일부분만 본거겠지만, 이제 막 입학해서 Berkeley Dad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기숙사에 입주하는 신입생들과, 일자리와 집도 없는 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무관심 섞인 시선 속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노숙자들이 이루는 완벽한 대조는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극적인 풍경이었다. 나의 처지는 전자에 훨씬 가깝지만 뒤에서 나를 지탱해 주는 온갖 기반이 없다면 나 역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점에서 길거리에 누운 그들에 비해 우월함 같은 걸 느낄 여지조차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삶에서 몇 가지 톱니바퀴가 엇갈린 듯한 그들을 보며 연민을 느꼈다.



집에 들어가 짐을 정리하려는데, 시원한 바깥과 달리 공기가 통하지 않아 숨이 막히는 듯한 더위 속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짐 정리를 마쳤고, 처음 만난 룸메이트와 간단한 대화를 나눈 후 지인을 만날 겸 밖에 나가 학교 캠퍼스를 둘러봤다. 생각보다 캠퍼스 내부에 건물들이 특정 지역에 밀집되어 있어 평소에 돌아다니기 그다지 힘들 것 같진 않아 보이는 건 다행인데, 그에 반해 좌우로는 길어서 학부 사이를 다니는 건 꽤 일일 것 같다. 10년 전에 초등학교 등교하던 거리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행히 엔지니어링 관련 수업은 대부분 학교 동쪽에 몰려있어 집에서 거리가 좀 있긴 해도 수업끼리 다니는데 불편한 점은 없을 것 같다.



해 질 녘이 되니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캠퍼스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면서 춥다고 느낄 정도로 기온이 내려갔는데, 워낙 열이 많아 시원한 곳을 선호하는 나에게 날씨 자체는 정말 모든 이상적인 조건을 충족한다. 엄청 춥지도 않고, 적당히 시원해 쾌적한 그런 날씨는 앞으로의 생활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밤에 집에 돌아와 한두 시간 정도 안 자고 버티다가 12시 땡 하자마자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처음 자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11시간과 비행과 시차, 그리고 하루 종일 열심히 돌아다닌 영향인지 얼마나 잠을 지새웠는지 생각도 안 날 정도로 바로 잠들어버렸다.


안개 낀 학교 북쪽Heartst Avenue의 풍경


그렇게 아침을 상쾌하게 해주는 시원한 공기에 눈을 뜨니 아침 7시, 환기하려고 힘들게 열어둔 창문을 다시 닫는 걸 깜빡하고 잠에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감기에 들지 않은 걸 보면 밤에도 엄청나게 춥진 않았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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