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기쓰는 복학생 Aug 20. 2023

채닝웨이 2490에서 600까지

캠퍼스에서 버클리 마리나까지 3마일 정도 걸어봤다.

미국에서 살기 시작한 지 이제야 4일 지났지만, 미국식 주소 체계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우리나라도 도로명주소로 바뀐 지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끼리 이야기할 때는 내정로, 백현로 같이 도로보다는 좀 더 넓은 구역인 동이나, 구 단위로 주소를 주로 사용하기에, 도로 위주로 찾는 게 어딘가 낯설다. 뭐 미국이 땅이 워낙 크고, 자동차 위주의 시스템이기에 도로 중심의 주소 체계를 구축하는 게 효율적이겠지만, 내정로 끝에서 끝까지 가는데 걸어서 20분도 안 걸리는 곳에서 살다가 온 나로서는 끝까지 가보기 전까지 채닝 웨이라는 게 얼마나 길게 뻗어있는 주소 구역을 포함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저 길게 뻗어있는 빨간 줄이 바로 채닝 웨이다.


버클리 마리나에 가보고 싶었다. 사실 그 전날에도 한 번 가려고 했다가, 아침을 굶은 탓에 다운타운 버클리까지 간 후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곧장 근처 맥도날드로 돌아갔다. 그에 오늘은 시간도 남고, 점심도 든든하게 챙겨 먹었고, 마침 할 것도 별로 없겠다, 방금 받은 교통카드를 가지고 어디라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방을 나서 곧장 길을 따라 내려갔다. 오후 4시쯤 출발했을 때 아직까지 GBO(신입생 OT)가 진행 중이라 집 근처 기숙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신입생들이 다 같이 모여있었는데, 그에 반해 마땅히 친구가 없는 나는 홀로 캠퍼스에서 먼 곳까지 걸어가는 꼴이라니. 혼자 다니는 게 나쁘다곤 생각하진 않는데 개강 이후에도 이런 상황이 계속해서 지속된다면 어딘가 심각성을 느껴야겠지..


1600 Channing Way


처음에는 지도를 안 보고 쭉 직진하며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내 위치도 모르고, 채닝 웨이 어디까지 내려가야 바다에 다다를 수 있을지 찾으러 구글맵을 켰다. 위치를 확인하니 채닝 웨이 800번 대, 2490에서 시작했으니까 3분의 2 지점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600번 정도까지 들어가니 갑자기 철창 펜스가 나오면서 길이 막혀버렸다. 건너편에 기찻길이 있는 걸 보면 채닝 웨이는 여기까지인가. 오는 길에 암트랙 표지판을 봤는데, 근처에 역이 있나 보다. 그나저나 왜 600부터 시작하는 거지. 다른 곳에 더 있는 건가.


채닝 웨이 800번대와 길의 끝과 함께 나타난 기찻길


길이 막힌 이상 다른 쪽으로 돌아가야 해서 다시 구글맵을 보면서 길을 찾아 나섰다.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대학 부근과는 달리, 바닷가에 가까워질수록 공장으로 보이는 큰 건물도 보이고, 틈틈이 빈 공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건널목 옆 기찻길과 근처에 있던 사케 공장


길을 돌아가 보인 기찻길 건널목을 건너자마자 Aquatic Park가 눈에 들어왔다. 공원 주변을 따라 걷다가 뒤돌아 내가 걸어온 길을 봤는데,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서 한눈에 펼쳐 보이는 버클리 시내의 전경과, 그걸 덮는 듯한 푸른빛의 하늘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동시에 바닷가에서 불어와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까지. 한국에서의 8월에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는 순간, 내가 태평양 건너 미국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Aquatic Park에서 본 버클리의 풍경


Aquatic Park를 넘어 바닷가로 가는 길에 고속도로가 있었고, 도로 위를 난 다리를 통해 도로를 건너갔다. 다리에는 투신자살을 방지하려는 건지 와이어 펜스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를 뚫고 어떻게든 고속도로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보고자 틈새에 렌즈를 갖다 대봤지만 초점이 자꾸만 고속도로가 아닌 철창으로 향해서 좀처럼 그럴듯한 사진을 찍지 못했다.



결국 흐릿하게만 나오는 사진 속 고속도로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초점이 맞지 않아 계속해서 흐릿하게 보이는 펜스 너머의 풍경은 현재 그려보려고 해도 그려지지 않는 미래에 대한 시야를 반영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무턱대고 미국까지 오기는 했지만 당장 일주일 후 미래도 예상할 수 없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인적, 물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도 마땅히 글을 읽고 쓰는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아직 수업을 시작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미국에 오자마자 쉽게 정착시킨 건강한 생활패턴뿐만 아니라 사는 방식 자체에 어떤 중요한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펜스에 맞춰진 초점에 가까운 도로마저 흐릿해 보이는 사진은 당장 가까운 미래조차 좀처럼 예상하지 못하는 내 상황을 반영하는 듯 했다.


여러 복잡한 생각들에 잠긴 채 조금 더 걸어 마침내 한 시간 반 만에 버클리 마리나에 다다랐다. 확실히 항구도시라 그런지 산호세 부근에서도 그렇고 정말 많은 수의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두바이나 아부다비, 도하 같은 부유함의 극치를 달리는 도시들을 이미 가본지라 마리나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사실 베이에어리어야말로 실리콘 밸리가 위치한 덕에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이 정말 많은 곳이기에 어쩌면 이런 마리나가 더 있어도 놀랄 건 없다. 나도 요트를 사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도, 돈 걱정에 괜히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적인 여유를 쟁취할 수 있을까.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않은 복학 첫 학기 전부터 내 미래를 상상하려고 하니 유독 만 입구에 자리 잡은 바다 너머 보이는 금문교가 더 멀게만 느껴진다(실제로도 12마일 정도 떨어져 있긴 하다만).


버클리 마리나 요트 선착장, 바닷가에서 본 저멀리에 있는 금문교는 너무나도 작다


걸으면서 느낀 거지만 미국은 참 차 없이 살기 힘드네. 돌아갈 때도 걸어가기는 해가 진 후에 위험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버클리 마리나에서 출발하는 51B 버스를 타고 캠퍼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기까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칠면조 같은 새를 봤는데, 그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기다리다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와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서 도중에 하와이에서 25년을 살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그 할머니는 나에게 미국에 혼자 온 거냐, 사는 건 이번이 처음이냐 등 여러 질문들을 해왔다.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스몰토크라는 건가.


정류장 근처 선착장과 주변을 돌아다니는 칠면조로 보이는 새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그분이 자기도 하와이에서 한국인 지인이 꽤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와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었고, 내가 그들은 한국계 미국인(Korean American)이라고 말을 해줬더니, 나에겐 그 둘 사이의 차이가 크냐고 물었다. 별생각 없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한국인과 차이가 꽤 클 거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물론 미국이라는 곳에 접근성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차이가 조금은 더 적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돌아가는 가치관이나 사회, 문화 등에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나 역시 어느 정도 그렇고.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순전히 과거 경험 없이 건너와 시작한 미국 생활이지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아시아인이 엄청 많다. 그중에 누가 미국인이고 외국인인지 구별할 눈치도 없어서 그냥 처음 마주하는 모든 사람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대한다. 반대로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대개 한국에서 왔다 하는 걸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선 보기 쉽지 않은 풍겨이지만 낯선 나에게 대개 친절하게 대해준다. 어떤 면에서는 아시아인이 많은 캘리포니아의 인구적 특징 덕분에 완전히 낯선 나도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있는 거기에, 이미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서 이곳에 정착한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감사함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결혼을 하고 정착하게 되면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은데, 그렇다면 나도 그 아이를 외국인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 주제는 나중에 한 번 다뤄봐야겠다.



걸어가는데 1시간 반 가까이 걸렸던 데 반해, 버스를 타니 20분 좀 넘게 걸려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미국은 대중교통이든 자가용이든 차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런 점에서 나는 언젠가 뉴욕 같은 대도시를 좀 더 선호하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뭐든 괜찮으니까 여기서 정착할 만한 기반을 만들어야 하니까 좀 열심히 살아야지... 오히려 개강하고 나면 시간이 없으니까 지금 글이라도 더 자주 써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공부와 학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