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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Nov 19. 2023

검정색 펜텔 스매시

지금이야 미드텀 이후로 정상적인 수면 패턴으로 돌아왔지만, 2주 전까지만 해도 해가 뜨기 시작하는 늦은 새벽 즈음에야 잠에 들고 해가 중천을 넘겼을 때가 돼서야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하면서 강의를 여러 번 빼먹어 따라가느라 애를 먹었다. 다른 날들은 강의를 빠져도 언제든지 녹화본을 볼 수 있어서 큰 문제가 없는데(라고 하기에는 일이 밀리는 게 문제다), 온갖 퀴즈가 몰려있는 금요일에는 내 패턴과 상관없이 무조건 가야 하기에 쪽잠을 잔 채 아침 일찍 일어나거나 밤을 새워야만 해서 피곤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한 주의 일과를 마무리하고는 했다.


2주 전 그날, 일어나 보니 9시 50분이어서 늦을까 봐 제대로 샤워도 못하고 허겁지겁 챙겨 시작 전에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하게 나온지라 책상 위에 있던 필통을 그냥 두고 와버렸는데, 나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필기구, 특히 샤프에 있어서만큼은 거의 10년 가까이 함께한 펜텔 스매시가 아니면 종이 위에 뭔가를 쓴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상당히 곤란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뭐 그렇다고 퀴즈를 보이콧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하는 수없이 옆 사람한테 부탁해 샤프를 하나 빌릴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호의에 있어서 그 질을 따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때 내가 쓴 샤프는 외관적인 부분이나 기능이나 초등학생 때 교문 앞 문구점에서 팔던 700원짜리 샤프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심이 제대로 고정이 안돼서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지기 일쑤고, 또 HB보다 단단해 부드럽게 안 써지는 샤프심에다가 적당한 무게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플라스틱 소재.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만 보면 미국에서는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자기만의 좋은 필기구를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은 듯하다. 어렸을 때는 이런 샤프에다가 300원짜리 부드럽다 못해 물렁해 종이에 써진 흑연이 액체처럼 번지는 샤프심까지 해서 1000원어치 문구류만 있어도 종이 위에 뭔가를 쓸 수 있었지만, 이제는 18,000원짜리 샤프에다가 한 통에 4,000원을 넘는 Ain Stein 샤프심이 아니고선 종이에 좀처럼 쓰려고 하지 않는다. 느끼지 못한 사이 조금씩 까다로워진달까.


그래도 감사하게 받은 샤프 덕분에 퀴즈를 문제없이 마쳤는데, 끝난 후 돌려주려고 한 걸 그냥 가지라고 했다. 지금 말고 딱히 더 쓸 일은 없을 텐데 하는 이유로 호의를 거절할 능력이 없기에 하는 수없이 다음 수업까지 가져가 퀴즈를 보는데 썼다. 그렇게 한 주의 일과가 전부 끝나고, 가방에 넣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플라스틱 샤프를 돌리면서 집까지 걸어가며 자연스럽게 긴 세월 동안 나와 함께 해온 검은색 스매시가 내 삶에서 가진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스매시 샤프는 종이 위에 쓰는 행위에 있어서 오랜 생활 동안 가장 주요한, 그리고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비록 아이패드를 사면서 애플 펜슬을 더 자주 쓰게 돼 리갈 패드에다가 글을 쓸 때 말고는 쓸 일이 많이 줄었지만, 시험을 볼 때도, 가끔 제대로 수학이나 물리 문제를 풀려고 할 때는 여전히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금요일 아침 정신없이 강의실 안에 들어간 후 샤프가 없다는 걸 깨달았음에도 재빨리 다른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한 채 혹시라도 필통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가방을 뒤지던 나의 모습은, 그만큼 그 샤프 한 자루가 나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보여줌과 동시에 쓴다는 행위에 있어서 삶의 영역이 샤프 한 자루에 제한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게 좋냐 나쁘냐를 떠나 이 샤프의 존재는 그 자체로 수백 장의 종이를 책상 서랍에 미리 보관해두게 해주는 이유가 되어주는 행위의 가장 중요한 일부로서 매일 내 가방 안, 책상 위에 놓인다.


군대에 있었을 때까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아 모르고 있다가, 나와 똑같은 걸 산 동기의 새 샤프와 비교해 내 스매시는 오래 쓰면서 자연스럽게 그립 부분이 닳아 광택이 날 정도로 매끌거린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저 오래 쓰면서 손에서 나오는 기름이 묻어난 거라고 생각하고 총기 손질 때 강중유를 적신 손질포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닦았지만, 때에 가려져있던 흠집만 더 선명해질 뿐, 잡을 때의 느낌은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문제는 그동안 그 미끈거림에 적응하면서 쥐는 법도 변해(샤프를 엄청 세게 쥐어서 한 시간 정도만 써도 손이 아프다) 이제는 어지간히 좋은 샤프를 사서 써보려고 해도 금세 적응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원래 쓰던 걸로 돌아온다. 제주도 여행에서 4만 원 주고 산 수제 목재 샤프와 긴자 이토야에서 산 4000엔짜리 샤프는 제대로 몇 번 쓰지 않고 한국에 있는 집 연필꽂이에 장식품 신세로 전락했다. 


가볍고 불편한 플라스틱 샤프를 쓰는 건, 빠르게 달리는 차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바람을 맞듯이 의식하지 못하던 단단한 삶의 틀 밖으로 잠깐이나마 나오는 경험이었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머리를 다시 넣으라는 부모님의 호통을 들은 것처럼 어느 순간 기존의 틀에 돌아오게 되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나는 다시 편안한 목장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한국이라는 익숙하고 안정적인 공간을 떠나 그동안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던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온 이유는 분명 한국이라는 틀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장을 열어보겠다는 과거의 열망이 작용했을 거다. 여전히 새로움에 대한 열망은 있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지나치게 관성적으로만 행동하고, 마치 가우스 면(Gaussian Surface)처럼 정해진 가상의 공간을 벗어나려는 의식적인 노력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뭘까, 편안함? 안정감? 안타깝게도 관성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마땅한 이유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마치 필통을 열었을 때 보이는 수많은 필기구 중 굳이 검은색 스매시만을 꺼내서 평소에 여러 개를 넣어두는 의미가 딱히 없는 것처럼 마치 정해진 법칙인 마냥 반쯤은 필연대로 따라가는 행동의 연속 위에 삶은 그저 서있을 뿐인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스매시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온다면 난 어떤 태도를 취할까. 익숙한 필기구가 사라진 결과 자체만으로 글쓰기에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겠고, 오래 지난 정이라는 건 어디 갔냐는 듯이 금세 비슷한 샤프를 사서 별일 없을 수도 있겠다. 아마 후자가 가장 가능성 높아 보이는 반응인데, 그 누구보다도 틀을 좀처럼 벗어나려고 하지 않다가도 일순간 벗어나게 됐을 때 찾아오는 인지부조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그동안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플라스틱 샤프를 쓰는 그 당황스러운 금요일 같은 경험이 더 자주 찾아오더라도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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