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 당시 MMPI라는 다면적 인성검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자기보고형 검사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연구에 의해 신뢰도와 타당도가 검증되어 있는 검사로, 실제 임상심리학자 70%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검사이다.
500문항 이상의 어마어마한 분량의 검사이기에 보통은 과제로 내어주지만 나의 선택으로 상담사와 함께 검사를 진행했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는 1시간~1시간반정도 소요되는 검사라고 하는데 나는 40분만에 끝내서 상담사가 놀라워 했었던 기억이 난다. (1년 후 정신과에서 같은 검사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당시 임상심리학자는 '시간에 쫓기듯 초조해 하는 모습이 관찰된다.'고 표현했다.)
MMPI검사는 당일 결과가 나오지 않기에 다음 상담때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65점까지가 정상범위이고 70점 이상부터는 기대범위를 벗어나기에 유의미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모두 정상범위 안에 있었지만 65점 경계를 넘어서 66점이 나온 부분이 바로 '반사회성' 이었다.
반사회적 성격장애는 사이코패스를 흔히 명칭하는 말이며 반사회성은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을 말하기에 검사결과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껏 미디어를 통해 사이코패스의 극단의 정보만을 접해왔기에 나와는 전혀 관련없는 성격의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그 사이코패스라는 반사회성을 가진 인간이었다니?????? 정말 소름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도 스스로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이코패스의 수준까지는 아예 생각해본 적도 없는 전혀 다른 세계의 것이었다.
물론 70점 이상부터가 유의미한 정신병리로 해석하기에 65점 경계에 걸쳐져 있던 나는 사이코패스라는 말은 아니라고, 그러한 성향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했지만 이미 그런 말은 내게 들리지도 않았다.
인생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떠한 피해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바로 '인생은 나쁜 놈들이 다 해먹고, 착하게 살면 호구된다.'주의였다. 굳이 가치관을 정립해야한다면 그것이 당시 나의 가치관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더한 것은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조차 전혀 모르고 살았다. 아주 당연한 생각이며 모든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상담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 많지는 않다는 것과, 왜곡된 시선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첫회기 상담때부터 사람에 대한 기대가 애초에 없어 실망도 잘 하지 않는다고, 그렇기에 남편과의 불화가 종종 있어도 실망 자체가 크게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신랑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으며 이미 학창시절부터 타인에 대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타인에게 기대가 없기에 실망도 없었고,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의지보다는 자기만족으로 사는, 타인의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늘 자신감 넘치는 아이라고 평가했지만, 정작 나의 내면은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자체가 없는 상태였다.
본래 인간이라 함은 사랑받고 싶고 사랑받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며 사는 존재이자, 삶의 목적이기까지 할 수가 있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부분이 반사회적 성향이라 할 수 있었다.
상담사는 이러한 성향은 애초에 사랑받고 싶은 욕구 자체가 없는 사람이거나, 혹은 어린 시절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여러번 좌절된 경험을 통해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이 감정 자체를 삭제해 버린 경우일 수 있다며 나의 경우는 후자인것 같다고 했다. 여러번 좌절된 경험으로 '나에겐 사랑받고 싶은 감정따윈 없어.' 라고 스스로 방어를 해버렸다는 것.
글을 작성하고 있는 지금은 이 반사회적성향에서 많이 벗어나고 1년 후 정신과에서 다시 시행해본 MMPI검사에서는 반사회적 성향이 보인다는 평가는 전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반사회적 성향에서 벗어난 것이 11회기의 단기 심리치료로 이루어진 성과는 아니었다. 심리학과에 진학하여 꾸준히 공부를 했고, 심리학 서적을 주기적으로 읽으며 통찰을 했다. 자아정체감을 찾는 경험을 통해 인생의 가치관을 바로 세웠으며 그러한 일련의 가정으로 반사회적 성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반사회적 사고로 똘똘 뭉쳐 세상을 늘 비관적이게 바라보며 살았던 나는 늘 긴장상태였고 불안했다. 세상이 적대적으로 느껴졌고 누군가의 의도를 늘 적대적으로 해석했으니 항상 신경이 곤두 서있고 피곤한 상태였다.
그리고 반사회적 성격에서 벗어난 후 세상을 향한 시선이 변화되었다. 세상은 모두가 함께 사는 곳이고 나쁜 사람도 분명 존재하지만 좋은 사람이 아직은 더 많이 존재한다는 믿음, 인간은 무한한 악과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반면 무한한 선과 이타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는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이 생겼다.
그러한 믿음으로부터 세상은 안전하고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사고의 전환을 경험하며 심리적 안정과 평온이 찾아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