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심리상태가 온전치 않아요. 가정보육 그만두세요"
심리치료를 진행하는 동안 가장 큰 변화는 아이를 기관에 보내게 된 것이었다.
완벽주의적 육아를 지향하고 있었기에 고전적 애착이론에서 말하는 36개월의 신화, 즉 36개월간 애착을 위해 가정보육을 고집하며 아이를 곁에 끼고 살았다.
여기서 '고전적'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최초로 애착이론을 발표했던 존 볼비는 36개월의 신화에 초점맞춰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대의 애착이론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36개월까지 꼭 엄마 품에서 키울 필요는 없다는 것, 기관을 다닌다고 불안정애착을 형성하지는 않는다는 것, 엄마의 심리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면 가정보육이 오히려 무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육아서적에서는 36개월의 애착신화를 이야기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고전적 애착이론을 신뢰하고 있다.
나 역시 36개월, 아니 아이가 원한다면 7살까지도 끼고 있을 생각이었다.
'의무교육이 아닌 유아교육을 굳이 아이가 싫다는데 보낼 필요가 있나? 엄마랑 같이 있는게 아이에게는 제일 좋겠지. 아이의 사회성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형성된다고 하잖아? 사회성 운운하며 기관에 보내는 엄마들은 솔직히 본인이 힘들어서 보내는거 아니겠어? 다 핑계일 뿐이야.' 라는 굉장히 이분법적인 생각이었고 나만이 답이고, 나에게 반하는 것들은 모두 오답이라는 왜곡되다 못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가정보육하는 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기도 했고, 기관에 보내는 엄마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리치료센터를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 비교하고 다닐 때의 일이다. 당시 내 상태를 보고 모든 심리상담센터에서 일관적으로 했던 말은 "엄마의 심리상태가 온전치 못하니 당장 아이를 기관에 보내라." 였다.
므어????!!!! 그렇게 가정보육만을 고집하던 내게 청천병력같은 선고나 다름 없었다.
엄마가 온전치 못해 아이를 기관에 보내야 하는 일이 생기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만을 좇는 사고였을지 모르겠지만 원래의 계획으로는 '아이가 원할 때' 기관에 보내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물론 원해서 가는 아이는 극소수에 불과하기에 가기 싫어하면 그냥 쭉 데리고 있겠다는 각오 역시 있었다. 그러한 거창하다 못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비현실적일 수 있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내게 아이의 의사와 관계없이 기관에 보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비난이 되어 돌아왔다.
당시 아이는 32개월의 4살 아이였다.
이미 아이의 친구들은 다 기관을 다니고 있었고 주변에도 기관을 안가는 친구는 딱 한명뿐이었다. 그마저도 적응문제가 있어 기관생활을 못하던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얼마나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는지 모른다. 아이가 분리불안이 아니라 엄마가 분리불안인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눈이 띵띵 부어 들어온 나를 보며 신랑은 어이없어 하며 코웃음을 날렸지만 내겐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였고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내게 있어 가정보육이란 처음 의도와는 달리 가정보육에서의 힘듦을 다른 형태로 보상받으려는 듯, 가정보육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어긋난 방향의 가정보육을 지향하며 고집한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내 아이는 4살 5월의 어느날, 뒤늦은 입학을 하여 첫기관을 다니게 되었다.
상담을 받으러 갔을때 곧 36개월을 앞둔 아이가 첫 기관생활이라하니 원장선생님도, 담임선생님도 놀라시며 4세반에 기관이 첫 경험인 친구는 우리 아이가 유일하다고 하셨다. 상담 당시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원장선생님은 나를 꿰뚫어 보며 엄마 멘탈이 너무 약하다는 말씀을 하셨고 당시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지나고서 돌아보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의외로 우리 아이는 분리도 쉬웠고 기관에서 잘 지내주었다.
적응 첫날부터 불안했던 나는 원장선생님에게 말해 특별히 원장실에서 씨씨티비로 아이를 지켜봤고, 원장실 유리창을 통해 아이를 관찰하기도 했다. 일주일 정도는 차에서 숨어 아이가 마당생활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고 당시 선생님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 죄송스럽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라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고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차 있던 상태였기에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렇게 그림자처럼 아이를 따라다녔다.
아이가 기관생활을 하고서 나는 한두달정도 불안에 떨며 지냈다. 휑한 집에서 울기도 하고, 아이 데리러 갈 시간만 눈빠지게 기다리고, 기존 하원시간보다 늘 1시간씩 일찍 데리러 갔다. 어린이집에서 엄마를 보고 싶어할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미안함, 죄책감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나 역시 서서히 아이의 기관생활에 적응하고 있었고 점점 선생님과 아이에 대한 신뢰가 생겨 불안을 떨치고 편히 쉴 수 있었다.
부모, 자식간에 정서적 밀착도가 높으면 좋은 것인 줄 알았다. 비단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관관계에서 진정한 친밀감은 그 밀착도가 현저히 높을 때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아이를 향한 (왜곡된) 나의 사랑에 대해 한 점의 의심조차 없었다.
나는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사랑했고 또 사랑했다. 그게 다 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넘어선 집착이자 동일시였다.
하루는 HTP라는 그림심리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집과 사람을 그려보라는 말에 나는 7세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를 그렸다. 그리고 상담사는 그림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그 여자 아이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때의 나의 대답은 "내 아이이자, 어린 시절의 나입니다. 그 둘은 같은 사람입니다." 라는 대답을 했다.
그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당연한 대답이라 생각했고 모든 엄마들이 그러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와 나를 '동일시'하고 있었으며 아이를 어린 시절의 나라고 느끼며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는 경계가 분명해야 한다고 한다.
부부관계에서도 그렇고 부모자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녀와의 관계가 너무 밀착되어 있으면 정서적으로 분리되지 못한채 아이의 독립을 방해한다. 부모, 자식간의 정서적 분리뿐만 아니라 자식의 자아분화마저 방해하고 자신과 타인 사이의 분화 역시 방해한다고 한다.
(자아분화란,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분리하여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인간적 성숙도와 직결되는 개념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분화란, 타인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 역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러한 분화수준이 높은 사람은 자제력과 객관성을 지니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타인에게 융합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육아의 목표가 무엇인가. 결국은 하나의 유기체를 잘 성장시켜 '독립'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부모와 정서적 융합의 정도가 너무나 심해 그것을 방해한다면 역기능적인, 잘못된 방법일 수 밖에 없다.
부모는 아이와 단절되거나 소원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지 않은 정도의 유연한 경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어쩌면 어릴 적 상처로 인한 결핍을 아이를 통해 보상받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육아의 목표가 아이의 독립도, 행복도 아닌, 그저 '나와 같은 결핍만큼은 물려주지 않겠다.' 라는 좁은 시각에서의 왜곡되고 편협한 목표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