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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Dec 31. 2020

화를 낸 '실수'를 '실패'로 치부하지 마라.


내가 심리상담센터를 찾은 궁극적인 이유는 아이를 향한 분노였다.

물론 다양한 심리평가를 통해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가 아닌 짜증이 베이스였고, 그 짜증의 근원은 우울이었다는 것을 밝혀냈지만 종종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는 경우가 있었다.


심리상담센터를 다니기 시작하고서 아이에게 내는 화나 짜증이 현저하게 줄었지만 어디 사람 일이란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아이는 엄마가 변화되는 과정을 옆에서 겪으며 엄마를 시험하듯 점점 떼와 고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화를 안내? 이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엄마가 화를 안내나 어디 두고보자.' 라고 작정을 하고 나를 시험에 들게 한 것 같았다.

갑자기 바뀐 엄마의 행동에 아이 역시 적응이 힘들었을 것이고 당연한 반응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솔직한 심정으로는 '에잇, 치사하고 더러워서 다 때려 치우자!' 라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했다.


항상 엄마의 강압적인 태도에 눌려 위축되고 소심했던 아이였고 떼나 고집은 커녕 엄마의 쓰읍 한마디면 모든 것을 고분고분하게 따르던 아이였다. 

아이가 25개월에 또래친구 5명과 나들이를 간적이 있었다. 나머지 아이들이 위험할 정도로 깔깔대고 뛰고, 엄마들은 기진맥진해 있는 상황에서 우리 아이는 그저 부러운 눈으로 그 아이들과 나를 번갈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나의 끄덕이는 고개짓 한번에 신나게 웃으며 뛰어가는 그런 아이였다. 고작 25개월이었다. 그때의 내 아이에겐 엄마가 곧 법이었다.


그러했던 아이가 엄마의 변화에 따라 엄청난 고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참 상담을 진행하던 34개월즈음 아이는 쇼핑몰 바닥에 드러누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그 자리를 뜨지 않겠다고 생고집을 부렸고 일단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화장실로 옮겨 아이를 달래도 보고 협박도 해보고 회유도 해보았으나 1시간 이상을 바닥에서 뒹굴며 울어댔다. 보다 못한 청소부 아주머니께서 시끄럽다고 쫓아 오셔서 엄마인 나를 꾸중할 정도였고 화장실 밖 사람들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질 정도로 발악을 했다. (발악이라 순화했지만 사실 발광이 더 적확한 표현인 것 같다.)


그렇게 변화되는 아이를 접하며 나 역시 시험에 들게 되었다.

대부분은 잘 참아내었지만 한번씩 버럭하고 화를 내기 일쑤였고, 기질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예민했던 아이는 부모의 화에 위축되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울기만 했다. 사실 다른 아이들이었으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릴 법한 정도의 화에도 굉장히 섬세한 아이였던 지라 그것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한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고 슬퍼했다. 그런 아이의 반응때문에 내 죄책감이 더욱 더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아이에게 버럭하고 심리상담센터에 급히 전화를 걸어 찾아갔다.

원래의 상담날이 아니었지만 화를 낸 스스로가 위기상황처럼 느껴졌고, 당장의 죄책감이 너무 힘들어 급히 일정을 잡아 찾아간 것이었다.


상담사는 내가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화를 내거나, 혹은 안내거나' 의 생각을 가지고 한번이라도 화를 내면 극심한 좌절을 겪었다.

인간이란 화를 전혀 안내고는 살 수 없고, 누구나 화라는 감정을 느끼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화를 내고 살기에 '화를 낸다, 안낸다'가 아닌 연속선상에서 어느 정도 수준의 화를 내었는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상담사는 말했다.

또 화를 한번이라도 냈으면 상담을 다닌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고 끝나버리는게 아니라며, 10번 중 3번정도는 화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니 '절대, 네버, 결단코 화를 내지 않는'은 극단적인 생각이라고 했다.


마치 금연을 계획한 사람이 잘 참아오다 한번이라도 참지 못해 흡연을 했을때 모든 것은 끝났다는 파국적인 생각으로 금연을 포기해버리는 것과 같이 화를 내버렸으니 심리치료를 포기하거나, 사고과정을 파국화시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화에 대한 좀 더 유연한 생각을 가져야 하며, 화를 절대 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한번 화를 낸 날은 "에잇, 화내버렸네. 오늘은 반성하고 다음번에 잘하자."라고 가볍게 반성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지 한번의 실수를 실패로 치부해버리고 죄책감에 빠져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화를 내고 나면 따라오는 이 죄책감이라는 것이 육아에 있어 굉장히 유해한 것이다.

아이에게 화를 내고 죄책감에 빠지는 엄마를 보며 아이는 그것을 자연스레 모델링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가 사회에 나가 화를 내게 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아이 역시 죄책감에 빠져 버리는 상황을 반복할 수 있다.


죄책감이 무조건 나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성찰, 후회와 반성, 발전과 성장을 생각한다면 꼭 있어야 하는 감정이지만 불필요한 지나친 죄책감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화를 낸 나는 '나쁜'엄마라는 자기명명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정작 현재의 육아에 최선을 다 하지 못하고 육아 곳곳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에게 오롯이 전달되게 된다.

우리는 좀 더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기대범위를 벗어난 죄책감은 엄마 뿐 아니라 아이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기에 의식적으로라도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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