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내 글의 대부분은 엄마보다 아빠에 대한 글이 많았다.
아무래도 아빠에게 쌓여있던 분노가 컸고 그러한 아빠로부터 지켜주었던 우리집의 진짜 '가장'은 엄마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엄마와 나는 일심동체마냥 융합된채 엄마를 나의 '편'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그렇기에 감히 엄마에 대한 큰 불만을 가질 수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엄마는 엄마로서의 역할에 더해 아빠 대신 실질적 가장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엄마가 든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일반적으로 자식에게 얘기하는 '아픈 손가락'이 내게는 바로 엄마였다.
농담삼아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지 않는가.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내게는 그 말이 그렇게 가슴아픈 말일 수가 없었다.
엄마가 공부를 못해서 공장에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엔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외할아버지의 실패로 가계는 무너져 버렸다. 그렇게 어려워진 가정형편으로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대학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취직을 했어야 했고 당장에 먹고 살기 위해 시작했던 일은 평생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엄마는 하루 12시간씩 현장에서 일을 했고, 한여름이면 차라리 밖에 있는게 시원하다고 할 정도로 더운 곳에서 매일 땀띠에 시달리기도 했다. 더한 것은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는 것이었다.
손을 심하게 다쳐오는 일도 잦았고, 어느 날은 팔이 올라가지 않았고, 어느날은 손가락이 펴지지 않기도 하는 등 무리한 관절사용으로 젊은 나이부터 이미 온 몸이 고장나기 시작했고 수번의 수술도 겪어내었다. 그리고 50대초반의 이른 나이에 류마티스 관절염까지 얻게 되었다.
교대근무로 수시로 수면시간이 바뀌었기에 하루 수면량은 5시간 정도였고 늘 만성피로에 시달렸다. 그런 생활을 수십년을 지속하다보니 면역력은 바닥이었고, 아픈 티를 거의 내지 않는 엄마임에도 내 기억에 엄마는 항상 작게든, 크게든 아팠던 것 같다.
진통제 3알을 먹고도 너무 아파서 밤새도록 혼자 끙끙대며 울고 있던 엄마, 마음이 힘들었던지 방 한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던 엄마. 이런 엄마를 매일 바라보면서 엄마가 이러다 죽는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살아왔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도 엄마는 일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기에, 아빠의 무능력함으로 엄마마저 일을 그만두면 살아가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34년간 살면서 엄마가 회사를 다니지 않는 모습을 본건 고작 2달이었다. 그것도 회사사정으로 인해서였고, 그 두달동안 몸은 편했겠지만 가계가 기울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엄마의 불안함은 결국 엄마를 다시 일자리로 몰아넣고 말았다.
아빠는 "누가 그렇게 일을 하랬냐, 관두고 싶으면 관둬라. 쉬어가며 조금만 일해라." 라고 말하면서도 본인이 가정경제를 일으켜 세울 방안을 찾지 못하였기에 사실 말로만 하는 걱정이었다.
자식들이 다 출가한 어느 날, 엄마에게 이젠 좀 쉬엄쉬엄 일하며 우리한테 용돈받아가며 살면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은근슬쩍 했더니 엄마는 단호하게도 "나는 내 몸이 더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진 일을 할거다. 일하지 않으면 살아있을 의미도 없다 생각한다. 몸이 더이상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건 죽을 때가 된 것이라 생각하기에 죽음에 아무 미련이 없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워커홀릭같은 얘기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남편 잘 만나 일하지 않고 집에서 놀고 있는 날 보고는 일하기 싫으면 일하지 말고 전업주부로 살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엄마는 여전히 가장의 자리에서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엄마에게 어떠한 불만이 있어도 불만을 품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날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엄마에게 불만을 품는 다는 것은 엄청난 불효라 생각했고 감히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에게 늘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내게 상담사는 "본인은 엄마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나요? 그리고 엄마가 어떻게 살길 바랬나요?" 라는 질문을 던졌고 나는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 그리고 엄마가 우리를 위해 그렇게 희생하지 않고 본인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본인의 인생을 살기를 바랐다는 대답을 했다.
상담사는 헌신하는 엄마, 희생하는 엄마를 자식들이 마냥 좋아하진 않는다. 자식의 마음에 짐이 될 수도 있고, 사실 자식들이 당당하게 자신을 챙기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바랄 수 있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그 말에 아이에 대한 지나친 희생쇼를 벌이고 있는 내가 투영되면서 과연 내 아이가 나의 이러한 희생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상담사의 그 한마디에 아이보다 나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자는 결심이 섰다.
그리고 엄마의 헌신에 대해 감사하긴 하지만 결국은 엄마의 선택이었음을 깨닫고 내가 무언가로 보답해야 한다는, 엄마의 안정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