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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Jan 29. 2021

검정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자존은 시작된다.

상담 1회기 시작부터 내게 부여되었던 과제가 있었다. 바로 감정일기쓰기.

감사일기는 들어봤어도 감정일기는 처음 들어보았기에 하루에수시로 바뀌는 그 수많은 감정을 일기로 다 옮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귀찮아서 과연 꾸준히 쓸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감이 가장 먼저 들었다.

첫회기 상담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그 순간부터 감정일기 과제를 하기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감정에 주목해야만 했다. 처음엔 부정적 감정이 느껴질 때마다 인식해 보는 시간을 가졌고, 그러한 감정이 작게든, 크게든 느껴질때마다 곧바로 기록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폰에 짧게나마 메모해두고 육퇴 후 느꼈던 감정을 곱씹으며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귀찮을 것이라 우려했던 감정일기는 의외로 귀찮기는 커녕 마음의 정화를 가져다 주었다.

완벽주의가 있어 어떠한 과제를 부여받았을때 그저 대충하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감정일기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충실한 과제 수행을 위해 본의 아니게 계속해서 내 감정에 집중을 해야만 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를 우선시하는 경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바쁘게 돌아가는 일과 속에서 늘 눈에 보이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마음에 주목해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자존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자의는 아니었지만 타의에 의해 시작된 나의 감정일기는 나도 모르는 사이 자존감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나의 메인 감정은 늘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노라 생각하고 살았다.

아이에게 잦은 화가 나 상담센터를 찾았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목표였으나 감정일기를 쓰면서 화가 아닌, 나도 몰랐던 나의 감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부정적감정이 치밀어 오르면 감정일기를 쓰기 위해 집중하는 동안 사실은 그것이 분노가 아닌 짜증, 섭섭함, 속상함 등의 다른 감정들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감정일기에는 화라는 표현 대신 짜증이라는 표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의 메인 감정은 분노가 아닌, 짜증이었던 것이다. (우울의 한 형태로 짜증이 자주 나타나기도 한다. 당시의 나는 우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부정적 감정이 밀려오는 순간 내 감정을 온전히 느끼며 '나 지금 화가 났구나. 그렇구나.' 라고 스스로 감정을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상담사가 말했던, 내 머리가 감정을 외면하고 억압하고 부정할때 감정은 더욱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듯 폭발을 일으킨다고 했는데 내가 나의 감정을 인정해주니 감정은 굳이 표출되지 않고도 평안을 되찾았다.


감정일기를 처음엔 우습게 생각했다. 내 감정 내가 알아차리는게 무슨 큰 일이나 생기겠냐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을 읽는 연습이 되기 시작하자 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자동반사적으로 스스로 감정을 파악하고, 인지적으로 화를 분출하는 것이 옳은 방법인지를 필터링하게 되었다. 감정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내 감정에서 한걸음 물러나 분리되어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심리치료를 받던 세달간 감정일기를 매일 작성했다. 세달이 지나고나자 더이상 감정일기가 없어도 감정에서 분리되어 사고하는 것이 습관화되었고 현재는 부적절한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예컨데 폭발을 일으킨다거나 스스로 감정에 휩싸여 부정적 기분에 압도당하는 것 등)을 더이상 행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담 이후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중이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은 부정적사고만을 하던 네거티브에서 감정일기를 통해 긍정적 사고가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것만 생각하는 파지티브라고 할 순 없지만 문제가 생기면 부정적 사고와 동시에 반대의 것인 긍정적 사고를 함께 하며 좀 더 객관적인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엔 딸처럼 키우던 강아지가 녹내장이 와서 실명위기에 처했을때 세상을 다 잃은듯 슬펐고, 나의 수명을 줄여서라도 강아지의 눈을 살리고 싶었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고 몇달을 슬픔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강아지의 반대쪽 눈에 녹내장이 발병하여 완전한 실명의 위기에 처했지만 슬픈 감정과 분리되어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고 강아지의 자연스러운 노화과정이며 후각에 의존하여 사람보다 더욱 잘 적응할 수 있음을, 적어도 녹내장으로 인한 어마어마한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좀 더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지난 날의 유리멘탈은 강철처럼 강해지고 있었다.


감정일기? 결코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습관화가 될 때까지 딱 달만 매일같이 내 감정에 집중하고 기록해보라.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현재의 나는 감정일기를 넘어서 감사일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이 역시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행복감의 증폭을 가지고 오고 있다.


나는 심리치료에서 감정일기의 역할이 상담사의 역할만큼 막중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효과적인 일이었고, 가치있는 일이었다.

자, 오늘부터 감정일기쓰기를 시작하라.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자존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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