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면 블로그에 남기는 내 글들이 모두가 과장되고 허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글에서는 가난했다, 못살았다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실제로 나는 대학도 나오고, 캐나다에 어학연수도 다녀왔으니
가난했다는 나의 말이 어쩌면
'니가 생각하는 가난은 내 기준과는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학창시절 나름 키도 크고 새하얗고 멀끔하게 다녔던 나였기에
외적인 모습만 보고는 모두 나를 새침데기 부잣집 따님처럼 보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대학에 다니고,
명품에 해외여행, 캐나다 어학연수까지
집에 돈이 어느정도 있으니 저러고 다니겠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한 나의 겉멋만 잔뜩 든,
겉만 번지르르한 모습을 보고는
다들 부자는 아니라도 나름 중산층의 가정에서
곱게 자란 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곤 했던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남들의 오해를
나는 굳이 시정하지도,
굳이 부인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왜냐, 가난이 내게는 너무나 비참했고,
무능한 부모를 둔 나를 누군가는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싫었고,
초라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사기를 당해 돈을 날려 먹고, 빚더미에 앉게 된 사실도,
엄마가 공장에서 교대를 돌며 가장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도,
내겐 떳떳하지 못한, 너무나 부끄러워 숨길 수 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고등학생때,
장애를 가진 아빠가 하교하는 딸을 보고 아는 척 하는 것을,
아빠가 부끄러워 아는 척 하지 않고 끝끝내 무시하고 지나갔던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는 모두의 입에 쉬쉬하며 오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얘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 친구의 행동을 함께 나무랄 수 없었다.
나 역시 그런 아이였으니까.
아빠를, 엄마를 대놓고 외면하지 않았을 뿐이지
친구들에게 차마 우리 아빠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엄마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나는 몇 평에 살고, 어느 아파트에 살고,
우리 부모는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밝힐 수 없었다.
아빠는 이것 저것 안해본 일이 없었다.
사업이랍시고 많은 일들을 벌이고 실패를 하셨고,
그 와중에 셔틀버스 운행을 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때 나는 셔틀버스를 타고 다녔었는데,
하필 당시 셔틀버스 차량 기사님이 아빠와 차량기사로서 안면이 있으신 분이셨고
내게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할때면,
내게 아빠 이야기를 종종 꺼내실때면
나는 친구들 앞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학교에서 엄마, 아빠 직장명을 적어가야 하는 학기 초에는
직장명을 떳떳이 적기가 부끄러웠고
누군가가 그것을 볼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부끄러움은 성인이 되며 더욱 심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세침한 부잣집 따님 같은 이미지로 보았고,
나와 데이트 하던 남자들 마저도 나에 대한 그러한 이미지를 가지고,
내게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들에게 사실 나는 가난하고,
아빠는 뚜렷한, 장기적인 직업을 가진 적이 없고,
엄마는 공장에서 교대돌며 실질적 가장을 맡고 있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타인들의 기대심리에 맞춰 나는 더더욱 그러한 사실을 숨기려 했고,
사귀던 사람과 잘되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 집으로의 초대,
부모에 대한 정보를 오픈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시궁창같은 내 삶을 오픈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러다 26살,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남편에게 정말 큰 용기를 내어 가정사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당시 겉으로는 무심하게, 툭 하고 던지듯 말을 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오픈하는 나는 티나지는 않았겠지만
정말 깊숙한 나의 수치심을 꺼내어 보여주는 것만 같았고
마치 벌거벗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아빠는 차량 운행을, 엄마는 공장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집으로 처음 남편을 데리고 왔던 날,
좁아터진, 20여년이나 된 우리 집을,
남자친구(현재 남편)에게 공개한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네식구가 이렇게 좁아터진, 허름한 집구석에서
부대끼고 살고 있는 걸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싶었고,
이러한 나의 시궁창을 보고서 떠나간다면
그래, 내 사람이 아닌거지.
차라리 그런 모습을 보고서 떠난다면
미리 걸러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라는 합리화를 하며 남편에게 공개했던것 같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걸 보고 떠나는 남자친구가 아니라,
이걸 보여줌으로서 초라해지고, 비참해지고, 한없이 불쌍해질 것만 같은
나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다.
우여곡절끝에 나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공개했고,
남편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내가 그러한 수치심을 가진 것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마냥
너무나 자연스레 우리 집에 흡수되어 왔고
결혼 전, 장장 6개월 정도를 데릴 사위마냥
좁아터진 내 방에서 함께 지내며
그 집에서 나의 부모와 함께 살아주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때, 어떠한 일을 하고 싶다거나,
어떠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막연히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던것 같다.
요즘 시대에 대학도 안나온 사람은 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집에서는 매일 돈돈 거리는 엄마와,
빚더미에 앉은 아빠는 매일 같이 싸워댔고,
내가 대학에 가면 정말 큰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워낙 청소년기 비행하며 막 살던 아이였기에
엄마,아빠도 내가 대학에 가리라는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던 것 같다.
내게 무얼 하고 싶니, 학교에는 가고 싶니
라는 질문 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당시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에
학교에서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그리고 부모 마저도
졸업하면 당연히 어디 공장에 취업이나 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딱히 꿈이 없었기에 어떠한 학과를 가고,
어떠한 대학을 가야할지 전혀 감도 없었다.
마냥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지만
명확한 꿈도, 비전도, 미래도 없으면서
대학을 진학한다는 것은
가난한 집에는 엄청난 리스크를 끌어 안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안그래도 힘든 부모에게
대학을 감으로써 더욱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대학교는 혼자서 자연스레 포기를 하였고
당연하게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공장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부모에게, 선생님께, 친구에게,
누구에게도 대학을 가고 싶다는 표현을 하지 못했다.
가고 싶은데도 못가는 내 현실이 너무 비참했으니까.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너무 비참해지니까.
그냥 꿈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은게 없으니까
굳이 대학에 가서 돈쓸 필요가 있나 싶다고
부모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그리 합리화하며 조금이라도 덜 비참해지려 노력했다.
그래도 나름 이름만대면 알만한 대기업이었다.
삼성전자에 취업했기에 그나마 돈은 잘 벌었다.
그리고 나는 회사에서 몸써가며, 밤낮 바꿔 교대 돌아가며
어렵사리 모은 돈을 아빠 치아를 하는데 탈탈 털어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고등학교때 내가 알바하던 주유소에 아빠는 주유를 하러 나와 함께 가게 되었고,
거기서 나를 알아보신 사장님께서 아빠에게 딸이 대학교에 들어 갔겠다며 반가워 아는 척을 하셨다.
아빠와도 친분이 있는 분이셨다.
그리고 창문 너머 아빠가 얼버무리며 예, 예.. 하며 나오시는 모습을 봤다.
내가 삼성에 취업했다 말을 끝까지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는 아빠는 내가 부끄러운가 라는 생각을 가졌다.
삼성에 들어가 쌔가빠지게 번 돈으로 아빠 치아도 해주고,
주기적으로 아빠에게 현금이며 선물 공세를 하던 나를,
삼성전자에 취업해 아빠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나를
아빠는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아빠는 내가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취업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돌아나오는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빠를 부끄러워 하는 것처럼 아빠가 나를 부끄러워 했나.
아니면 대학에 보내지 못한 아빠의 무능함이 부끄러운건가.
알 수 없었다.
차마 물어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렇게 공장에서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열심히 돈을 벌었다.
어떠한 목적도 없이 그냥 벌었다.
가난했으니까.
그냥 가난에서 탈출하는게 목적이었다.
공장을 나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고졸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었다.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돈을 벌어 나와서 무언갈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어떠한 삶의 방향도, 목적도 상실한채
그냥 돈만 벌었다.
하루는 당시 현장관리자였던 일명 반장님이
폰으로 명품을 검색하고 있던 내게 다가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여기 다니는 애들 집안 사정 뻔한데,
너 돈 벌어다가 이런데 쓰려고 그러니?"
나를 걱정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한심하다는 듯 나를 비꼬고,
네까짓게 이걸 사겠다고?
와 같은 말투였고 나는 굉장한 수치심을 느꼈다.
가난이라는 수치심은 가지고 있었지만,
반장의 그 한마디는 공장의 현장직인 이 무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이고,
안그래도 가난한데 내가 그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이 말은 한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는 어느날, 회사에 사내대학 공지가 올라왔다.
선택할 수 있는 과가 많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 가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사내 대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3교대를 돌면서 회사를 마치면 대학교에 다녀야 했다.
잠이 늘 부족했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학교 생활은 너무 재미있었고 만족스러웠다.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는 아니었지만
대학생활을 한다는 자체만으로 너무 좋았다.
그리고 열심히 한 덕분에
학교에서 성적 장학금도 받으며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사내대학교를 다니며 공장에서 일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이렇게 공장에서 평생 목적없이, 의미없이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나는 학교에서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퇴사의사를 밝혔다.
"엄마, 나 회사 그만둘래."
당연히 안된다고 할 줄 알았다.
뒤지게 욕 얻어 먹고 혼날 줄 알았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온 엄마의 말에 나는 너무나 놀랐다.
"그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엄마는 알겠다고 했다.
조금 더 참아봐라, 기다려봐라, 조금만 더 다녀보자
어떠한 회유도, 설득도 없었다.
엄마에게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없어 대학에 안간다고 하였지만,
엄마 마음 속에는 늘 본인의 무능함으로 대학에 보내지 못한 딸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가정에 주기적으로 돈을 보내거나 부모를 부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파릇파릇한 스무살에 공장에 가서 매일 같이
나사나 돌려대고 있는 딸이 안쓰럽고 미안했던 거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엄마는 그러라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길로 퇴사를 하게 되었다.
퇴사를 하고 나와 무엇을 할지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그저 다니던 대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면 관련 직업을 선택하면 되겠지.
아무 대책없이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학교 역시 흔히 말하는 지잡대였기에
학교에서의 배움의 퀄리티는 떨어졌다.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취업의 길을 열려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학교 학생들은 삼성전자라도 다니고 있는
우리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으니까.
그렇게 대학교 졸업시즌 즈음이 되었고,
무얼할지 몰라 망설이던 나는 대학교에 컨설팅을 나오게 된,
해외 대학 연계 프로그램의 컨설팅 설명을 듣고 막연히 해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다음에 이어 써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