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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Apr 30. 2022

캐나다까지 따라온 가난이라는 그림자

대학을 다니면서 한번도 부모님께 손벌리지 않았다.
내가 2년반동안 열심히 공장에서 밤낮바꿔 일하며 벌어온 돈으로
대학교 등록금을 충당했다.

대학 등록금과 대학생활 내내 생활비는 그렇게 회사에서 벌어나온 돈으로
어찌저찌 충당해내었는데,
해외에 나가려니 금전적인 부분에서 막혀버렸다.

사실 지금 전공이 내가 하고 싶어 선택한 전공은 아니었다.
사내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현저히 좁았기에
게중 그나마 관심있던 곳을 지원한 것이었지
다니는 동안 내게 잘맞는다거나,
이것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러한 전공을 살려 해외 유학을 간다는 것 역시
해외에 나가기 위해 쓸데없는 전공을 선택하는 것과 같았다.

그때도 나는 딱히 하고 싶은 공부는 없었다.
내가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 조차 몰랐다.
그냥 막연히 해외에 나가고 싶었다.

평생을 구미라는 공업도시에서 벗어나본적이 없었다.
엄마가 처녀시절 공장에 일하기 위해 자리잡은 이 곳 구미에서,
나 역시 이 공업도시에서 공장일을 하며 살아왔고,
그저 다른 곳은 어떤가 궁금했다.
조금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조금 더 새로운 세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공부를 위해, 영어를 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경험을 해보고 싶어 나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떠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명목으로 훌쩍 떠나버리기에
나는 여전히 가난했다.
부모에게 손벌릴 수 있는 상황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그렇게 다른 세계 이야기려니,
포기하고 있던 찰나 워킹홀리데이 비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당장에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고
당시에는 캐나다 워홀이 막 체결되었던 당시라
뽑는 인원이 적었고 경쟁률도 굉장히 셌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나는 덜컥 합격을 해버렸고
그렇게 캐나다로 떠나게 되었다.

당시 내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초딩때 배웠던 Hi,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정말 이 정도 영어로 캐나다에 넘어왔다니
아무것도 모르고 무식했으니 감행할 수 있었지
지금에서야 그 영어로 다시 도전하라면
손부터 절레절레 하지 싶다.

난생 처음으로 해외를 혼자 나가봤다.
캐나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은 난관에 부딪혔다.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뭐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그레이션을 가라는데 이미그레이션이 뭔지도 몰랐다.
정말 엄청난 긴장을 한 상태에서,
뭐라는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엄청난 양의 짐을 양쪽에 끌고, 등에 들쳐매고는
쩔쩔대고 있었다.

하지만 타고난 외향성 때문인지
캐나다에서도 나는 쉽게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모르는 한국인에게 덜컥 말을 걸고 도움을 요청했고,
한국인의 도움으로 이미그레이션으로 넘어가서는
캐나다 할아버지에게 아는 영어 단어를 총동원해서 질문을 했다.

다행히 예민한 사람이라 그런지
눈치코치는 빨라서 어찌저찌 비자를 받아내었고
그렇게 나는 캐나다 땅에 구구가가 아기영어 수준으로 덜컥 떨어져버린거다.
말 그대로 맨 땅에 헤딩이 그런거였다.

당시 200만원 정도 여윳돈을 가지고 넘어갔던것 같다.
캐나다는 물가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비쌌다.
게다가 집도 절도 없는 나는
숙소비만 해도 엄청나게 나갔고
처음엔 쌀에 계란 하나만 구워먹으며 버텨내고 있었다.
200만원을 다 써버리면 나는 더이상 살 수가 없었으니까.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것도 아까워
먼 거리도 걸어다녔다.
한국에서의 가난함은 더이상 가난함이 아니었다.
캐나다에서의 가난함은 정말 극한의 상황까지 나를 몰고 갔고
불안함 속에서 그렇게 캐나다 생활은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나는 일을 구해야만 했다.
영어도 안되면서 무슨 댐마로 일을 구하겠다고 설쳤는지 모르겠다.
영어가 들리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어디든 면접을 봐야했다.

당시 캐나다에서 룸메를 구한다는 글이 올라왔었고,
단기 쉐어로 들어간 그 곳에서 나는 운명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인 친구였는데, 나와 나이가 같아 금세 친해졌고
그 친구에게 도움을 받아 면접영어를 친구와 함께 하루동안 열심히 연습했다.

나는 그렇게 캐나다 서브웨이에 면접을 보게 됐다.
당시 매니저는 내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물론 영어로.
눈치만 빨라서는 단어 한두개를 알아듣고 귀신같이 대답을 했다 단답으로.
아는 영어 총동원해서 무조건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이전 일했던 한국인 직원이 일을 너무나 잘했기에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 매니저는
그저 나를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믿고 고용을 했다.

영어를 몰랐던 나는 내 선임 한국인직원에게
서브웨이 관련 영어들을 인수인계를 받고 그 분은 그만두었다.
원래 인수인계 의무도 없었지만
워낙 영어를 못하던 상황이었기에
그분에게 부탁해서 관련 영어들을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함께 일하는 코워커들은 죄다 외국인이었기에
그 분이 아니면 나는 부탁할 곳이 없었다.
그만두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 분에게 질척대며 부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서브웨이에서 일을 하며 다행히 숙박비와 생활비는 해결할 수 있었다.
안되는 영어로 손짓 발짓하면서 부딪히며 일을 했다.
영어를 못하니 코워커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도 따질 수 없었다.
영어를 못하니 코워커들과 사소한 일로도 오해가 생겨 감정이 상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친해진 손님도 있었고,
내가 일마치길 기다렸다가 함께 산책하는 손님이 생기기도 했다.
그 손님과 온몸에 샌드위치 냄새 풀풀 풍기며 (서브웨이 특유의 스멜이 있다)
저녁에 손님의 강아지를 벗삼아 함께 산책을 즐기곤 했다.

그 손님과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내게 어느순간부터 이성으로 다가오려했다.
하지만 타고난 불안정 애착때문인 것인지,
한국인 남자에게도 철벽을 치는 나였는데,
외국인 남자에게는 어떠하겠는가.
철벽도 그런 철벽이 없었다.

대놓고 거절하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더이상 관계가 진전되는 것도 무서웠다.
핑계를 대고 매일 이리저리 둘러대며 만남을 회피했고
결국은 내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며 그 친구는 나를 떠나겠다고 했다.

나는 어떠한 아픔이 있고,
그러한 아픔으로 너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사람에 대한 불신이 있고,
너를 믿기가 두렵다.
그러한 진심을 결코 전할 수 없었다.

영어에 대한 한계가 아닌,
이러한 나를 이상하게 볼 것만 같았다.
그냥 내가 솔직하지 못한, 진실하지 못한
못된 사람이 되는 것이 속편했다.
그렇게 그 연락을 마지막으로 그 친구에게는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적어서 그렇지,
그 친구는 캐나다에 처음 적응할때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친구였다.
그렇기에 정말 감사했고,
친구로서 계속해서 지내고 싶었지만
인간에 대한 불신은 내게 있어 어떠한 커다란 벽을 치게 만들었고
그것을 깨부수는 것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돈을 벌며 생활비를 충당해 가면서도
나의 영어는 크게 늘지 않았다.
서브웨이에서 사용하는 영어만 기가 막히게 늘었다.

그래도 참 생활력은 얼마나 질긴지.
거기서 알게된 한국인 언니에게 영어과외를 부탁했다.
언니는 한국에서 잘나가는 영어선생님이셨다.
그리고 나는 염치없게도 그러한 사람에게
꼴랑 10불을 주면서 1시간 과외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정말 돈없는 유학생이었으니까.
아니 당시엔 공부도 안했으니 유학생도 아니었다.
돈없는 외국인 노동자였으니까.

정말 착해빠진 언니는 감사하게도 10불만 받고서 내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정말 초등 저학년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던 내가
언니의 영어수업을 듣고 어느정도 문법을 제대로 구사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캐나다에서 참 고마운 사람들 투성이다.

그렇게 어느정도 문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고,
주변에 외국인들 덕에 영어에 귀가 트이게 되고,
나는 투잡을 뛰기 시작했다.
서브웨이만으로는 숙박비와 생활비 정도만 충당되었기 때문에.
나는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학원비나 학교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서브웨이에서 새벽6시부터 오후3시까지 일을 하고 나면,
나는 다음 식당으로 바로 달렸다.
오후4시부터 새벽1시까지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그렇게 하루 4~5시간 겨우 자면서 투잡을 지속했다.

몸은 고되었지만, 돈은 쌓여갔다.
하지만 그 역시 풍족하진 않았다.
많은 유학생들이 선택하는 학교나 학원을 등록할 수 없었다.
나는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학원을 찾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어쩌다보니 많은 유학생을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집이 여유로워 부모의 돈으로 캐나다에 넘어온 친구들이었다.
부모가 제공하는 돈으로 생활을 하였으니 크게 부족할 것 없었다.
부모가 지원하는 돈으로 홈스테이를 해결하니 숙박비의 부담도 없었다.
심지어 홈스테이의 퀄리티 역시 나와는 달랐다.

나는 2베드룸에 5명이 함께 사는 아파트먼트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많이 낑겨 살 수록 가격은 내려갔다.
그래도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살 수 있음에 좋았다.
외국인 친구들과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니 내게 도움이 되었다.
종종 외국인 친구들이 몰려와 모임을 가질 때면,
교회다니는 룸메가 교회 사람들을 매주 몰고와 교회모임을 할때면,
술취한 룸메가 소란을 피울때면
힘들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거기서 알게된 유학생 친구들은 다들 삐까뻔쩍 좋은 곳에서 홈스테이를 했고,
혹은 2베드를 2명이서 나눠쓰는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엄청나게 비싼, 한국에서도 유명한 캐나다 어학원이나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자기 유학원이 좋다, 자기 어학원이 좋다, 자기 학교가 좋다
내게 여러 추천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추천대로 할 수 있는 돈이 내게는 없었다.

그저 정부에서 지원하는, 가장 싼 곳을 찾아 해맸고
월 60~70만원 정도 하는 학원을 찾아내게 되었다.
(대부분 유학생들은 월 150정도 하는 학원을 다녔던것 같다.)

정보를 확인하고는 당장 학원에 예약을 하고 찾아가 레벨테스트를 받았다.
레벨테스트 결과는 과외 덕인지, 영어권에서 영어에 귀가 트여서인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중간이상의 레벨이 나와 나는 깜짝 놀랐다.
초딩수준의 영어로 넘어와 중간이상의 레벨이 나오다니.

그렇게 나는 투잡을 뛰면서 어학원까지 다니게 되었다.
어마어마하게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서브웨이에서는 설거지를 얼마나 해댄건지
손에 습진이, 팔에는 세제로 인한 화상이 생기기도 했다.
생전 처음 세제로 인한 화상을 입어 봤다.
왜 화상이라 부르는지 알겠을 정도로 굉장히 쓰라리고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학원까지 다니기 시작하니 나는 화장품 살 돈 조차 없었다.
스킨살 돈도, 로션 살 돈도 없어
룸메가 한국에 돌아가야 할 시기가 되어 쓰던 화장품을 버리고 갔는데
그걸 주워쓰다 피부가 난리가 나서 뒤집어 진 적이 있었다.
얼굴은 2배정도 퉁퉁 부풀어 올랐고,
온 얼굴은 진물로 뒤덮였다.
쌍카풀이 사라지고 입술이 부어올랐고
병원에서는 피부병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의 가난보다도
훨씬 극한의 가난을 그곳에서 경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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