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캐나다에서의 생활은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더 고되고 힘들었던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 있던 지인들로부터 들려온 나의 소문은
내가 돈이 많아서, 부모가 잘나서, 캐나다에 가서 떵떵거리고 즐기면서
세상 편안하게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래, 거기서 어학원과 학교에서 공부를 하긴 했으니 유학생은 맞겠지.
하지만 종종 내게 넌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와서 영어 잘하겠다, 부럽다.
라고 지인들이 무심하게 던지는 말을 들으면 나는 무언가 불편한 감정이 들곤 했다.
내가 유학생이었나? 외국인 노동자였나?
사실 공부를 하고 왔음에도 내가 유학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노동을 더 많이 하고 온 느낌이었으니까.
사실 공부보다도 생존에 목숨걸고 있었으니까.
어학연수, 유학을 다녀왔다는 말을 들을때면
'아닌데 나 외국인 노동자였는데' 라는 생각이 들곤 했기에
떳떳하게 나 거기서 공부하고 왔어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캐나다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 나는 항수병에 걸려 한국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사실 그때는 몰랐는데 그때부터 나는 우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니, 훨씬 이전부터
종종 우울을 경험하곤 하였는데
분노와 함께 표출되어 우울을 우울로서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캐나다에서 나는 14키로나 살이 쪄있었다.
주변에 사람은 많았는데 늘 외로웠다. 늘 공허했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먹는것에 집착했더니 살이 엄청나게 불어 있었다.
캐나다에 입국할때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채로 혼자서 공항을 걸어 나왔지만
캐나다를 출국하면서는 7명의 친구들이 나를 공항까지 배웅해주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없는 이별을 하면서 나를 포함한 몇몇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상했다.
그렇게 많은 인연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늘 외롭고 공허한 이 느낌은.
그저 향수병인가 생각했지만 우울감이었던것 같다.
그렇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한달여즈음 되었을때 영어학원을 찾았다.
영어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찾은 그 곳에서
나는 스피킹, 리딩, 라이팅 모두에서 최상위 레벨을 받았다.
초딩 수준의 영어로 나간 캐나다였기에
수준이 중간 정도는 올랐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최고레벨이 나오다니.
얼떨떨했다.
(물론 1년쯤 지나, 영어에 대한 노출이 전혀 없어지자 영어실력은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고
현재도 나 캐나다 다녀왔어요 라는 말을 하기가 아주 민망한 수준으로 영어수준은 바닥이 되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비싼 학원과 학교에서 값비싼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일반 유학생들과는 조금은 다른 길을 밟았기에
뭔가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 있었다.
최고레벨을 받았으면서도 운이 좋았겠지, 일시적이겠지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얼마전 상담사는 상담에서 내게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 자라주었네요!"
????
그 말을 듣자 약간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한번도 '잘' 자랐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아동기 초기경험부터가 꼬여버렸고
늘 불안한 가정에서 자라며
내가 필요할때 부재했던 부모로
삶이 늘 불안했고,
만성 불안에 시달리며 중학교때는 비행을 했다.
그 비행의 결과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이어졌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가난한 나는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다.
어찌저찌 사내대학교를 통해 대학에 갔지만 흔히들 말하는 지잡대였고,
그곳을 졸업해서도 어떠한 성과없이 캐나다에 훌쩍 떠나버렸다.
캐나다에서도 극한의 가난을 느끼며
주변 잘나가는 부자 유학생들 사이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며 힘든 외국인 노동자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이루어 놓은것 하나 없는 사람이다.
뭐 하나 내세울게 없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그렇기에 잘 자랐다는 말을 듣고는 처음엔 의아했다.
상담사는 내가 삶에서 아주 큰 풍파를 여러번 겪었다고 했다.
PTSD라고 여겨질 만한 큰 사건도 아동기에 경험했다.
엄마는 교대근무를 했기에 어린 나를 남겨 두고 밤에 일을 나가야 했고
전혀 의지가 되지 않는 아빠와 동생과 함께 남겨져
엄마의 부재에 대한 공포를 애써 견뎌내며 살아왔고,
또한 부모의 지속된 싸움으로 매일을 전쟁과 같은 공포를 느꼈다.
중학교때 잠시 비행을 했지만
고등학생이 되며 금세 비행을 접고 돌아왔다.
상담사는 중학생때의 비행은 사실 중2병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냐.
그 시기에 어른의 권위에 대한 도전, 어른의 생각에 대한 도전,
그리고 반항심은 당연한 거다 라고 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잘 자라주었네요.
라고 했다.
나의 아픔을 봉사활동이나 타인을 돕는 것으로 승화시켰고,
나의 고통을 부모를 향한 효로서 승화시켰고,
대물림을 하지 않기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위해 아픔을 나누고 기꺼이 함께 하려 함을.
상담이 끝나고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나 잘 자란거 맞나?
나의 부정적인 면만 계속해서 보아왔다.
애초부터 부모 잘 만나, 혹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과
출발선이 달랐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들보다 못난 나를 탓했다.
부모를 탓하기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너무나 잘 자란 훌륭한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내 가정때문에, 내 부모때문에 공부를 안했다는 것은
합리화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나의 그릇이 거기까지 였을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사는 결코 환경을 무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한다.
당연히 PTSD라 불릴 정도의 경험을 했다면 만성 불안에 시달렸을거고,
당연히 가정이 불안정하면 공부하고 싶은 의지는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나의 과거를 하나하나 곱씹어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참 잘 자랐구나.
부모에게 경제적 짐을 주지 않기 위해 대학을 포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을 나왔다.
대학에서도 성적우수장학금은 놓치지 않았다.
삼성에서 일하면서도 단순노동이었지만 늘 열심히 해내었고
결과가 좋아 자주 시상을 받기도 했다.
회사에서 전사원이 진행한 골든벨에서도
생산직이었지만 내가 만들고 있는 그 제품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고 결국 최후 1인으로 골든벨을 울려 시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골든벨을 울리겠다고 열심히 책들고 다니며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같이 일하던 언니는 니까짓게 골든벨을 울린다고? 라며 대놓고 나를 조롱하기도 했고,
이해안가는 부분이 있어 반장님께 찾아가 질문을 하는 나를 보고
반장님도 아주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 설명해주시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내가 골든벨을 울렸을때, 전사원이 어리둥절해 했다.
캐나다에 가서도 모든 생활비와 학비는 스스로 마련했다.
역시 부모에게 한번도 손을 벌리지 않았다.
부모에게 받은 불안정 애착을 대물림하지 않기위해,
아이를 나와 같은 불안한 아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
갓난쟁이 젖물려가며 한손에는 육아서적을 들고 읽어가며
득달같이 공부해왔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내가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모로부터 형성된 이 성격을 어찌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어
상담센터를 내 발로 직접 찾아 나를 변화시키려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상담사가 되고자 마음 먹었고,
상담사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사이버대를 들어갔고 열심히 공부했다.
여전히 남들은 좋은 대학 나왔는데, 나는 사이버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위축되고 소심해질 때도 있었지만
좋은 학벌을 가진 상담사는 되지 못하더라도,
진심을 다해 내담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상담사가 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상담사가 되고자
나의 소신을 믿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노력의 결실로서 성적우수상을 받으며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대학원에 들어와 여전히 나는 매일 같이 공부에 매달리고
이론을 떠나 어떻게 하면 내담자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진정성 있는 상담사가 될 수 있을까를 늘 고뇌하곤 한다.
남들이 생각하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엄마는 못되었지만
그래도 내 상황에서,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했다.
내가 다니는 대학 내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 노력했고,
내가 다니던 직장 내에서 좋은 업무성과를 내려 노력했다.
100점 엄마는 못되지만 내가 가진 역량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했고,
대물림을 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쉽지 않았기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자 상담센터를 제발로 찾았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나 참 잘 자라주었구나.
나 참 열심히 살았구나 싶다.
사실 내가 블로그에 나의 아픔을, 나의 취약점을 모두 공개하는 이유가
나 같은 애도 잘 살고 있어,
그러니 너는 더 잘 살아낼 수 있어.
라는 메세지를 주고 싶었다.
이렇게 상처 투성이에, 약점도 많고, 또 열등감도, 수치심도 많았던 나도 잘 살고 있어.
같이 살아내자. 잘 살아내자.
라는 말을 던지고 싶었다.
내 블로그엔 나만큼 아픈 사람들이 자주 들어와 본다.
공감이나 댓글은 많지 않지만
나만 확인이 되는 글의 조회수는 감사하게도 늘 많다.
그리고 가끔가다 한번씩 본인도 같은 상황임을,
본인도 같은 아픔을 겪었음을 함께 공유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
아직 유능한 상담사가 아니다보니
그분들에게 댓글을 남기기가 상당히 조심스럽다.
내가 남기는 댓글 하나로 상처를 받을 수도,
혹은 상처에 기름을 부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보니
종종 댓글을 달지 못하거나, 무성의해 보이는 댓글을 남기기도 한다.
그저 그들에게 무어라 위로의 말을, 공감의 말을 던져야 할지 모르겠어서
정말 고심끝에 남기는 댓글임에도 댓글로는 내 맘이 다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러한 나의 경험을 나눔으로서
그들에게 위로와 공감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찌질하고 한심하고 불쌍한 나의 불완전하고도 또 불안정한 모습까지 이렇게 공개하게 된다.
그러니 같이 잘 살아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