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아파트 단지의 분리수거날이라
아침부터 바삐 쓰레기들을 분리하고 있었다.
마침 아이아빠가 출장가는 날이라
출근시간이 늦기도 했고
여차하면 아빠에게 아이 준비를 도우라 할 생각으로
바쁜 아침시간에 나는 분리수거에 꽂혀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침시간이라 시간은 촉박하고,
분리수거를 하는데
집안 곳곳에 아이가 흩뿌려놓은
색종이들을 종이류에 함께 분리하려고
거실에서, 주방에서, 안방에서 주섬주섬 줍다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얘는 왜 색종이를 온데 흩뿌려놓은거야?!'
밥을 먹고 있던 아이에게 한소리를 하고 말았다.
"너 이거 아무데나 놔둔거 다 버려도 되지?
제자리에 정리해놓지 않았다는건 다 버려도 된다는 뜻이지?
무얼 버려야 하고 무얼 정리해야할지 난 모르니
정리 안돼있는 니 색종이들은 다 버린다."
통보와 협박이 섞인 말투였다.
화나 짜증은 없었지만
부정적 감정을 유발할만한 말이었다.
아이는 밥을 먹다말고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그러라 했고
나는 아이가 만들어놓은 색종이 작품들을 죄다 버려버렸다.
아이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평소 신체화증상을 자주 보이기에
늘 못마땅했는데
순간 아차싶었다.
내 말투에 문제가 있구나.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아이는 마음이 불편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는
신체의 통증으로 호소하곤 했다.
나는 그제야 아이의 신체화가
나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그만먹으라 말하자
아이는 시무룩해져 방으로 들어갔고
아이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이 이게 아닐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엄마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었다.
"집안이 개판이야! 다 갖다 버린다!
정리 안해? 다 갖다 버린다!
니가 정리안했으니까 다 버릴거야!"
그때 나는 기분이 매우 안좋았었다.
정리 안한 내가 죄인이 된 듯한 느낌과 함께
엄청나게 눈치가 보였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아이에게 다가가 사과를 했다.
"팔땡아, 아까 종이 다 갖다 버린다 해서 기분 안좋았지?
엄마가 미안해. 생각해보니까 너가 속상했을 수 있겠더라.
엄마도 어릴때 뽀뽀할머니가 정리안하면 다 갖다버린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 기분이 안좋았거든.
근데 그걸 잊어버리고 너한테 똑같이 말해버렸어.
미안해. 다음부터는 갖다버린다고 안하고 정리하자고 말할게."
아이는 그제야 기분을 풀고 끄덕끄덕 해주었다.
나는 평소 화를 자주 내지 않는 좋은 엄마라 생각했다.
실제로 화낼 일은 자주 있지 않았고
한달에 한번 화낼까말까 였던것 같다.
하지만 화만 안냈다 뿐이지
아이에게 알게 모르게
짜증이나 협박, 통보와 같은
부정적인 언행들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아이는 엄마보다 아빠가 좋다 하고,
엄마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겠지.
그렇다고 아빠의 육아방식이 옳다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빠는 또 너무나 그런 것들에 일체 언급이 없다.
안되는건 안되는거고, 고쳐야 할건 고쳐야 함에도
아이에게 말한마디 없기에
엄마와 아빠의 그 가운데의 중간지점이 필요했다.
아이에게 자주 하던 말이었다.
'정리 안했으니 갖다 버린다.'
지금껏 한번도 이것이 잘못된 말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생각없이 내뱉고, 물흐르듯 흘러가던 말이었다.
내게는 생각없이 한 말일지라도
아이는 그 말에서
엄마의 거부적 반응과 부정적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들어온 것들을
그대로 학습하여
아이에게 그대로 대물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그것을 깨닫고
아이에게 급히 사과했다.
부정적 감정을 교묘하게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아이에게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원하는 바를 솔직히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
"니가 종이를 아무데나 흩뿌려놓으니 엄마가 치우기가 힘들어서 기분이 안좋네.
팔땡이가 다음부터는 종이를 잘 정리해 두었으면 좋겠어.
팔땡이도 같이 치우자."
나 전달법이 필요했다.
나는 이러이러하게 느껴.
이론으로 엄청나게 배운 것임에도
나는 나의 일상에는 전혀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빠가야로.
나는 여전히 참 미숙한 엄마인가보다.
팔땡아 그래도 엄마 노력하는 모습이 이쁘지? 잘하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