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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Apr 08. 2022

아이와의 동일시

자기전, 아이는 불꺼진 방에서 뒤로 눕다가 내 얼굴을 쾅 하고 박았다.

순간적으로 화가났지만 강하게 표현하지 않고

"엄마 여기 박아서 아프잖아~ 맨날 조심하라 하는데 왜 자꾸 엄마한테 와서 박는거야"

라고 약간 짜증섞인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화가 아니었기때문에 그냥 어 미안! 하고 넘길 수 있는 건데도

아이는 잠시 후 조용해지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엄마 화낸거 아니야~ 너무 아파서 그렇게 말한건데 속상했어?"

물으니 그거때문이 아니라며 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분명 그것때문이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엔 신나서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뭐때문이냐니까 자기도 모르겠다며 말을 안한다.


아이가 속상해하면 나는 그걸 지나치지 못하고 늘 어르고 달랜다.

며칠전 등원할때 내게 혼난 아이가 울면서 등원을 했었기에

그 날은 장문의 편지를 써서 하원길에 전달하기도 했다.


나는 아이가 속상해하면 그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엄마다.

아이의 짜증이나 화는 비교적 잘 무시하면서

아이가 속상해하거나 슬퍼하는 감정에는 굉장히 민감하다.

조금만 슬픈 표정이 보이거나 시무룩해하면

민감하게 포착하고 기분을 살피고 어르고 달랜다.


이러한 나의 행동이 아이의 속상함과 슬픔을 강화시켜왔던 것 같다.

그래서 어젯밤은 더이상 강화시키지 말고

아이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아이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게끔 두고 보았다.

아이는 내가 반응이 없자 훌쩍훌쩍 소리를 더 크게 내기 시작한다.

엄마, 아빠가 알아주고 달래달라는 것처럼.


하지만 끝까지 모른척하고 그냥 자버렸다.

지금껏 나의 행동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행동이 아이의 예민함을 극도로 강화시키고 있었을 거란 생각에서 말이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이 되었고

기분이 리셋된 아이에게 모른척 하면 될 것을,

나는 아직도 속상함이 이어지고 있을까 걱정이 되어

어젯밤 이야기를 꺼내며 괜찮냐 묻는다.

아이는 다시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참..)


생각해보니 나는 아이가 속상함과 슬픔을 느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빠르게 해결해주거나 달래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것 같다.

보통은 아이의 화를 견디지 못해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데

나는 반대로 아이의 슬픔을 견디지 못해 아이를 어르고 달랜다.


내 속에는 분노가 가득한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나는 분노로 위장된 슬픔이 가득한 사람은 아닐까.

내면의 어린 나는 슬픔이 가득한 사람이라

아이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건 아닐까라고 말이다.


상담사는 내게 아이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다고 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많이 좋아졌다 생각했는데

상담사는 더 분리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공부하며 많은 것을 내려놓았는데 더 내려놓으라 한다.

그냥 용돈만 주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용돈만 주는 엄마 이야기를 듣는데 가슴한켠이 굉장히 시리면서 마음이 시큰해졌다.

나는 아이와 분리되는 것이 여전히 힘든 엄마구나.


예전 그림심리검사를 할때, 사람을 그려보라는 말에 나는 유치원생의 여자아이 하나를 그렸다.

그리고 그 아이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때 이 아이는 바로 어린 시절의 나이자, 내 딸입니다.

라고 이야기했다.

그때 아이는 영유아기의 아주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는 6~7세 정도의 아이를 그려 나이자 아이라고 표현했다.

내 속에 남아있는 어린 수빈이는 6~7세에 멈추어 있나보다.

그리고 그 시기에 남아 여전히 슬픔 속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었나 보다.


나는 딸아이와 나를 매우 동일시 했다.

그림 속의 아이는 나이자 딸이었고

딸에게 행하는 모든 행동은 나에게 행하는 것과 같이 느꼈고,

딸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마치 내가 느끼듯 느껴졌다.

민감한 엄마라 좋겠다고 하지만

나의 민감함은 한걸음 떨어진 민감함이 아닌,

내가 마치 아이가 된 듯 느끼는 그러한 감정이었고

하루에도 내 감정과, 아이의 감정

두 인격체의 감정을 느끼다보니 나는 항상 피곤하고 불안하고 소진되어 있었다.


상담사는 어린 내가 받지 못한 애정과 관심을,

어린 내게 필요했던 빈자리를 채우기라도 하듯,

아이에게 모든 정성을 쏟아 붓고 있다고 했다.

나의 내면 아이가 필요했던 모든 것들을 내 아이를 통해 충족시키고

대리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던 거다.


그럼에도 그 결핍은 쉬이 충족되지 못했나보다.

채우고 채우고 민감하게 채워 올려도

아이의 작은 슬픔에도, 작은 속상함에도

나는 그 감정을 강하게 인식하고 반응한다.


분노로 가득차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늘 화가 먼저 났기에 화가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화를 직시하고 들여다보았을때

분노는 분노가 아니었다.

표면에는 분노의 모습을 한 슬픔이 가득했다.


MMPI 심리검사에서도 나는 반사회성과 함께 우울이 높게 나왔었다.

반사회적인, 적대적이고 화가 많은 모습이 나의 표면의 모습이라면

그 수면 아래에는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자신감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가 갔다.

늘 자신감이 넘친다는 피드백을 받고

강하고, 쎄고, 직설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표면으로는 쎄고 강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감 넘치는 행동으로 보여왔지만

기저에는 슬픈 아이가 잔뜩 웅크린채 있었던 것이었나보다.

나의 슬픔이라는 감정을 부정하기 위해,

나는 슬픔을 꽁꽁 무의식에 억압시켜 놓고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적대감으로,

쎄고 강한 행동으로 나를 표현하고 있었나보다.

슬픈 사람이기보다는 강한 사람이고 싶었나보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아이를 통해 나의 내면아이가 비추어지기에

아이가 나의 거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통해 나는 어린 나를 바라본다.

아이를 마치 어린 시절 나라고 여기고,

나는 아이에게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노력이 아이를 예민하고 민감하게 만들었다.


더이상 아이를 통해 어린 나를 바라보지 않아야지.

한걸음 떨어져, 아이를 온전한 아이의 모습으로,

어린 시절 내가 아닌, 한 개인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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