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빈 Aug 16. 2022

내 아픔은 나만 건드릴 수 있어. 손대지마.

나는 꽤나 솔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솔직함이 나의 장점이자 또 단점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함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직설적으로 나의 생각을 표출하곤 했다.
누군가는 그러한 직설적인 모습을 부담스러워 하고,
누군가는 그러한 모습에 앞뒤가 똑같은 사람이라 신뢰가 간다 이야기 했다.

나는 나의 아픔과 고통을 사람들과 잘 나누었다.
나는 이러이러한 약점이 있고, 이러이러한 아픔이 있어.
라고 솔직하게 이야기 하곤 했다.
블로그와 같이 오픈된 공간에서조차
나는 나의 약점이 될 만한 이야기도 술술 잘 풀어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불쌍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혹은 약하게 보지 않았다.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약점을 가진 나조차도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려는 강인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분명 나는 약점을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강인해 보인다고 이야기 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다른 사람에게 연약함을 느끼던 사람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내게는 강인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집단상담을 다녀왔다.
상담에서 나는 나의 과거 아픔들을 다 털어놨다.
개인상담이 아닌지라 인원이 많았음에도
나는 나의 아픔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이 안전하게 느껴져서도,
그들에게 수용받고 공감받는 느낌을 받아서도,
그들이 따뜻하게 느껴져서도,
그들에게 소속감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그냥 원래의 나대로 나는 또 한번 무덤덤하게 나의 과거를 밝혔다.

집단상담에서 주제는 숨기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주제에 맞는 무언가를 말하려 해도
도무지 주제에 맞는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워낙 솔직한 사람이다보니,
이미 블로그에 나의 모든 것을 죄다 쏟아내고 있다보니
비밀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었고,
이미 다 밝혀진 이상 숨기고 싶은 맘도 더이상 없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숨기고픈 모습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냐.
그리고 나는 너무 억울했다.
진짜 비밀이 없는데 어쩌라고 !!! 싶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들을 쏟아내는데
사람들은 공감을 보내었고
이상하게도 나는 공감을 공감으로 수용하지 못했다.

힘드셨을것 같아요...
아뇨? 힘든것보다는 섭섭함?

속상하셨을것 같아요...
아니, 속상함보다는 외로움?

뭔가 사람들이 공감을 던질때마다
공감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교류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패를 들고 나와 모든 교류를 튕겨내고 있는 느낌이라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할때마다
나라는 책을 꺼내서 그에 맞는 페이지를 펼쳐 읽어주는 느낌이라고.

그리고 아차 싶었다.
사람들이 내게 교류하는 느낌을 가지기 보다는,
친하다는 느낌을 가지기 보다는
피상적인 관계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구나!! 하고서
당시 이 피드백에 굉장히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나로부터 튕겨져 나간 공감은
비난이 되어 돌아왔고
나는 날것의 있는 그대로의 피드백이
내게 생각할 거리는 많이 던져주고 있음에
만족하며 상담을 마치고 돌아왔다.

당시 상담에서 나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감을 받을때도, 그리고 비난을 받을때조차도.
기분이 나쁘고 좋고를 떠나
그저 모든 것에 이유를 찾아 분석하고
머리로 접수하고 있었다.

오케이, 내 문제점1 접수.
내 문제점2 접수.
그리고 솔직한 피드백들을 받으며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문제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가?
이 문제의 장점과 단점은?

머릿속은 매우 바빴고
하나하나 분석을 하느라
나는 감정은 느낄 새도 없었다.

상담사는 내게 감정을 느껴 보라
어떤 감정이 드느냐 물었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무감정이라고 하는게 맞았다.
아무런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고
내게 튕겨져 나간 공감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상처받았다며 날 비난할때에조차도
나는 무미건조한 "미안합니다"를 읊었다.

물론 상대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진실된 사과가 아님을.
그냥 상처 받았다니까 미안하다 했지
나는 진실로 미안하지 않았다.
이 역시 인지로 처리한 미안함이었다.

당시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는건 대실패를 했고
그렇게 집단상담이 끝나고 문을 나서는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씨발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어라? 뭐지? 하고 놀랐다.

분명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뒤늦게사 나타난 씨발이라는 목소리에
내가 무얼 느꼈던가? 하고 돌아보았고
집으로 가는 동안 계속해서 곱씹고 곱씹고 곱씹고
엄청난 집중을 보이며 곱씹어 보고서야
당시의 감정이 느껴졌다.
아니 사실은 당시에는 진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인지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게끔 아예 차단하고 있는 느낌이었고,
혼자 뒤늦게사 곱씹으며 생각하니 그제야 감정이 올라왔다.

비난받은 것에 대한 분노와 섭섭함이었다.
내게 들린 씨발이라는 목소리는
깊숙이 숨어 있는 감정이 내는 목소리였다.
씨발


그리고는 느꼈다.
나의 솔직함은 진실된 솔직함이 아님을.

나는 사람들에게 솔직함을 내비쳤다.
나의 아픈 과거도, 고통도, 상처도
모든 것을 거짓없이 진실하게 보였다.

하지만 상담사는 내게 말하곤 했다.
"수빈씨의 말에는 감정이 전혀 없어요. 그냥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아요.
분명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랬다.
상처를 이야기하면서 감정은 쏙 빼고서 인지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인지로서 나는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니
듣는 타인에게는 아무리 약점을 이야기하고 있어도
세고 강인하게 들렸을 것이다.

아픈 이야기를 하는데도 무덤덤했고
그러한 사건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나의 솔직함은 사실은 가장 숨기고 싶은 감정은 격리시켜놓고
사건 그 자체만을 솔직히 읊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그때의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혹은 지금의 나는 그걸 얼마나 안쓰럽게 생각하는지,
지금의 나는 얼마나 아픈지가 아니라
사건 자체만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래놓고는 나는 아주 솔직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나의 과거를 다 오픈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돌아보니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내 아픔은 나만 건드릴 수 있어. 너네 건드리지마."

나의 과거를 다 까발리면서
나는 비언어적인 형태로 이야기한다.
감정을 쏙 빼고서,
세고 강하고 또 잘 헤쳐나갈 것 같은 느낌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아픔에 손도 못대게끔
애초에 세게 표현해버린다.
여긴 내 영역이야, 침범하지마.

그리고 그것은 감정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감정은 나만 건드릴 수 있으니 건드리지마."
공감을 날리는 이에게, 칭찬을 하는 이에게도
나는 불편하고 어색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내게 아무리 공감해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공감 역시 내 영역인 감정을 침범해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불안하게 느낀 것 같았다.

내 감정에 손대지마.
니가 뭔데 날 공감해? 니가 뭔데 날 판단해서 칭찬해?

누군가가 내게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행사하는게 싫었다.

늘 장난처럼 하던 말이었다.
인생은 독고다이.
그리고 나는 그것을 여전히 실천하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피해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유는 너 역시 내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말라는 이유에서 였다.

나는 타인이 내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렇기에 시댁에서 아이가 걱정되어 계속해서 전화를 할때면,
아이가 아플때 병원 데려가라 마라 하는 시댁에게
짜증이 나곤 했다.
병원에 가려다가도 시댁에서 저리 말씀하시면
딱 가기 싫어지곤 했다.

시댁에서건, 할머니네서건
남자들을 위해 과일을 깎고, 수저를 가지고 오라고 하는것이 싫었던 이유는
그 대상이 남자들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그들이 싫었던것 같다.

그리고 타인의 여러 영향력들은 내게 위협이 되어 다가왔다.
그들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내게 있어
패배감과 굴욕감으로 다가왔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남녀간의 싸움이 쉽게 끝나지 못하는 이유는
여자는 사과의 의미를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에 대한 미안함이라면
남자는 굴욕감을 참고 무릎을 꿇는 의미로 해석한다고.

나 역시 그러했다.
타인이 내게 행사하려는 영향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상하게도 패배감과 굴욕감을 선사했다.


나는 마치 철갑을 두르고 전장에 나와 고군분투하고 있는 전사와 같았다.
집단상담에서 내게 모든 화두가 집중되고
나는 모든 사람들의 말에 방어를 한다고 바빴다.

방어를 위해 감정을 미루어놓고
인지가 나와 강인하게 싸우고 있었다.
내게 공감으로든, 비난으로든, 혹은 교류로든
내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그들에게
강인하게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정말 전장에서 싸우고 돌아온 것과 같은
엄청난 피로감과 고통으로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
인지를 강하게 발달시켰다.

그제야 나의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기 시작했다.
인정욕, 통제욕까지도.

타인이 내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나는 강하고 센 언행들로 먼저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내가 먼저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타인들은 깨갱하며 물러났고
나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왜 나는 처음 만나는 모임에서도 스스럼없이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다가가고
모임을 꼭 주도하여 이끌어 나가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누군가의 영향이 내게 오기 전,
먼저 선수를 쳐 버리고자 함이었음을.

무엇이 그리 무서웠던가.
타인이 무서웠던가.
혹은 감정이 건드려지는 것이 무서웠던가.

모든 것에 솔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듯
강하고 센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인지만이 솔직했고 감정은 여전히 깊숙이 숨어 있었다.
겉으로 강한척하지만
결국은 약한 감정이 건드려질까 두려워
나는 강하고 센 모습만을 내비추었다.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하게
철저히 방어하느라 바빴다.

수빈아,
너는 무엇이 그리 불안하고 두려웠니,
무얼 널 그리 위협적이라 느끼게 만들었니,
왜 그렇게 철갑을 꽁꽁 둘러놓고
스스로를 과도하게 방어하며 살아가고 있었니,
무엇으로부터 널 지키려 한거니,
얼마나 아팠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더이상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꽁꽁 숨겨두었니...

매거진의 이전글 모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