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나는 솔로라는 티비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다.
그리고 출연자들 중 9기 영숙이에게 나는 엄청난 강인함을 느꼈다.
사실 영숙은 굉장히 여리여리하고, 문제를 회피하길 원하고, 울기도 잘하는 울보였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세고 강한 스타일의 사람들이 대거 출연했었지만, 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의 소유자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프로그램에서 영숙은 옥순과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이 붙었다.
그리고 개인 인터뷰에서 영숙은 말했다.
"저는 사실 문제가 있으면 회피하는 사람이에요. 만약 바깥이었으면 저는 이런 상황에서 피해버렸을 거에요. 하지만 여긴 피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전 너무 힘들었어요."
그리고 눈물을 보였고 곧이어 한 말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저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에게 피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피하는 것 또한 하나의 옵션이잖아요. 그리고 전 피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저렇게 나의 예상되는 패배를 인정한다고?
패배가 두렵다고 저렇게 쿨하게 인정한다고?
회피가 부끄럽지 않다고????
나는 평소 삶을 지거나 혹은 이기거나로 살아온 것 같다.
늘 과도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었고,
경쟁을 하는 상황이 아님에도 스스로는 경쟁의식을 늘 품고 살았다.
사람들이 다 같이 한 냄비에 먹는 음식을 먹을때면 내가 더 많이 먹기 위해 무리하다 체해 탈이 난 적도 있었다.
항상 손해보지 않으려, 지지 않으려 촉이 서 있어 누구보다 빠르게 이득을 착취하곤 했다.
그렇기에 아이가 영악하지 못하게 느릿느릿 본인 밥그릇을 못챙기는 모습을 볼때면 속에 천불이 나곤 했다.
육아는 경쟁이 아님에도 다른 아이와 내 아이를 늘 비교하며 누구보다 발달에서 앞서나가야 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빠른 발달을 보이던 아이였지만 조금이라도 다른 아이가 치고 나올때면 배알이 꼴리곤 했다.
나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경쟁의식 속에 지고 이기고가 다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 인생에 회피란 없었다.
누군가가 내게 기분이 상한것 같으면 카톡이고 뭐고 우회 없이 만나서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요? 말해보세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느끼면 권위자에게도 나는 목소리를 내곤 했다.
심지어 직장 선임들에게도 큰 목소리를 내며 싸우기도 했다.
발표시간엔 서로 두려워 숨는 상황에서도 나서서 직면하여 돌파해버리곤 했다.
오토바이를 훔쳐 타는 학생들을 잡아다 경찰에 넘기고 훈계를 일삼기도 했다.
내게 있어 회피란 말 그대로 패배였다.
그리고 나는 패배하지 않기 위해 늘 직면만을 하고 살았다.
내게도 분명 두려운 마음은 존재했다.
예전엔 오토바이를 타는 아이들을 붙잡아 경찰에 넘기는 내가 정의감에 불타, 선의로 그러한 행동을 했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의감 이전에 패배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 나의 욕구였던것 같다.
불량한 학생들을 보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는 행동은 지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고, 나는 그러한 느낌이 싫어 "야 니들 일루와. 이거 어디서 훔쳤어? 어느 학교 학생이야?!" 큰소리를 냈던것 같다.
한창 무서울 나이의 불량한 학생들인데다가, 남자아이들에, 다대일의 상황인지라 누가봐도 내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두려운 감정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두려운 감정을 눌러 이겨버린 것은 패배감이었다.
지는것 같은 그 느낌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리고 무식하게 직면을 일삼고 다니던 어느날, 상담사는 내게 말했다.
상황에 따라 회피하는 것 또한 필요하고, 그것도 지능이라고.
뭔가 멍텅구리가 된 느낌이었다.
좀 모지래는 애;
어쨋든 요지는 누가봐도 위험한 상황이고, 피해야 할 상황에서도 회피는 커녕 달라드는 내게 너의 안전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구나? 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나는 영숙에게서 패배를, 더 나아가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하는 모습에서 정말 멋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나의 나약한 부분을 감추려 강인함을 앞세우는데, 강한척, 센척, 아프지 않은 척, 척척척을 하고 있는데
영숙은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두려운 상대를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인정하며 나 지금 도망가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양껏 드러내 보이는데
그게 또 그리 멋질 수가 없었다.
이후에도 영숙은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보여도, 까였다는 예상이 들어도,
날것의 슬픔과 속상함과 눈물을 보이며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좋습니다 라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영숙에게서 저것이야 말로 진정한 강인함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약함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질 것 같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용기없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려움을 인정하고 피하고픈 맘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였다.
인생을 살다보면 늘 이길 수만은 없다.
모든 것이 경쟁상황도 아니거니와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쟁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스스로의 패배감을 용납할 수 없어 더욱 강한척하며 살았다.
가끔은 지는 것을 받아들일 줄도,
패배감을 인정할 줄도,
또 두려움을 받아들일 줄도 아는 것이
내게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가끔은 도망가도 괜찮아.
회피해도 괜찮아.
두려워도 괜찮아.